저녁에 기다릴 일이 없어졌구나. 우리 내외가 덜렁 앉아 있기에는 집이 너무 커졌다. 마당의 팽나무와 앞집 감나무는 거기 마냥 서 있지만 예전처럼 보이지 않고 흘러가는 구름도 예전 같지 않다. 해 지는 풍경은 어쩌면 이리도 적막한가.
딸이란 장성하면 배필을 얻어 나가는 것이 섭리이거늘, 내 어찌 그 이치를 모를 리 있을까마는 흘러간 스물여섯 해, 아쉬움이 많아서인지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누나. 철이 철인지라 밤 대추 사과에 배들이 앞에 풍성하건만 그릴 생각조차 못한다. 음악은 늘 하듯 종일 듣고 있지만 아름답던 모차르트의 선율도 귓전만 울리고, 찬란한 ‘전원교향곡’도 가슴으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작업실에 들어갔다 나오고 또 들어갔다 나오기를 하루에도 몇 차례.
흙 붙일 심봉대가 오늘따라 왜 저리도 처량하게만 보이는가. 열나흘 달이 찬 하늘에 하얗게 빛나고 있다. 귀뚜라미 너희들은 무슨 사연으로 울어대는가. 고요를 가르는 그 소리들로 하여 이 밤을 더욱 깊디깊은 고요로 만들고 있다.
아내여, 고마운 사람아.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는 뜻을 당신은 너무도 잘 안다. 아비 된 모든 사람의 심정이 같을진대 범부(凡夫)의 길, 그 한 과정을 내가 지금 겪는 것이다. 세상에 어디 예외가 있겠는가.
태풍이 가슴 밑바닥을 뚫고 지나갔다. 어질러진 마당을 정돈해야지. 내가 겪은 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긴 바람이었다. 여진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일을 시작해야지. 오늘에나 또 내일에나. 평상심으로 돌아가야지.
세상이 갑자기 더 넓어졌다. 모든 것이 한층 사랑스러워 보이는 까닭은 또 무엇 때문인가. 모든 사람이 희구(喜懼)해 마지않는 것. 행복이라든가 평화라든가 하는 것.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는데 가장 가까운 곳은 마음 안이라는 뜻이겠는데 어떻게 찾을 것인가.
군에 간 아들이 돌아오는 어느 토요일쯤 날씨 좋은 날 할머니 산소에나 가야겠다. 한 그루 노송이 서 있는 곳, 훤칠한 키에 붉은 피부는 언제 보아도 시원하다. 창밖에 핀 노란 국화 한 송이, 딸네 집에 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