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가고 산들바람과 함께 가을이 또 찾아왔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감나무 열매는 빨갛게 익어가고 팽나무 잎새들은 노랗게 물들어 간다. 세월은 가고 또 가고, 오고 또 오고 하여 봄여름은 순서대로 한 치의 어김이 없다. 그침 없이 변화하고 끝없이 반복하는 자연의 오묘함 앞에 지금은 유난히도 옷깃이 여며지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쪽빛 하늘은 천 리를 단숨에 펼치고 있다. 하늘로부터는 황금 볕이 쏟아지고 땅에서는 온갖 곡식이 익어간다.
오십을 훨씬 넘기고서야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의 즐거움도 차츰 알게 되었고 따라서 삶의 고마움이 가슴에 차 오는 것도 보았다. 인생길에 늙어간다는 것이 결코 섭섭한 것만은 아니었다. 보람이 있든 없든 하루를 살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 가을 이런 날에 시집간 딸이 첫아기를 낳았다. 나는 손자를 얻었고 그리하여 진짜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첫딸이라서 그랬는지 신랑 만나 보내놓고 얼마나 막막했던가. 세월이 약인지 그럭저럭 평상심을 되찾던 중에 순서 지켜 만삭이 되는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차에, 새벽에 병원 간다 하여 뒤따라 쫓아간 아내가 한참 만에 전화로 알려오기를 하루 저녁 지내볼 일이라 했다.
나는 자그마한 좌상(坐像)을 흙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십견이라 해서 어깨 아픈 병이 생겼는데, 한여름을 핑계 김에 잘 놀다 맑은 가을바람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근래 몇 년간 나는 일을 너무 급하게 했다. 그런데 왼손을 움직여 쉬엄쉬엄 흙을 만지자니 답답하기는 했지만 천천히 생각나는 재미가 또 있었다. 따로 할 일도 없고 하여 나는 작업실로 내려가 비닐을 벗기고 하던 일을 시작했다. 착잡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열두 시였다.
“우리 지영이가 아기를 낳았어요. 아들이래요.”
아내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순산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왔다. 그 순간 어머니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구나.
마음 바쁜 며칠이 흘러가고 딸네는 새 아기를 안고 저희 집으로 들어앉았다. 첫날은 시댁 어른들께 자리를 양보하고 다음 날에사 나는 손자 생면의 행보를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참으로 신기했다.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아기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엄마 뱃속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사람아, 할아버지가 왔네.
할아버지가 아무리 높을지라도 도리 없이 인사를 왔노라. 그 놀라움과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사흘 밤 사흘 낮이 한 달 폭은 되는 것 같았다. 마침 추석 앞이라서 고향 길 성묘를 갔다.
“어머니! 손녀딸이 멋진 아이를 낳았어요.”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무언가 축하예물을 하나 만들어야지. 가진 게 그림 그리는 재주뿐이라서 작은 스케치북과 파스텔을 꺼내 들고 단숨에 모자상(母子像)을 한 장 그렸다. 이게 또 어인 일인가. 예쁜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와서 그런지 모든 그림이 슬프고 고뇌에 찬 것으로 되어왔는데, 어인 일인지 아기도 엄마도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밝고 사랑스러운 그림이 된 것이다.
나는 날마다 딸네 집에 드나들었다. 아기는 날마다 달라졌다. 볼 때마다 안 하던 짓을 하는데 그때마다 나를 기쁘게 했다. 두 이레가 되던 날 표구된 그림을 들고 가서 어떠냐 하고 내놓았다. ‘승명(丞明)이, 몇 년 몇 월 며칠에 낳다.’라고 뒤에 써놓고 사인을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외조부라 쓰라 해서 적어넣었는데, 공연한 짓을 했구나 하고 멋쩍게 웃었다.
아내는 날마다 바빴다. 산후에 좋다는 것, 젖 나오는 데 좋다는 것은 무엇이고 해다 나르는데 짜증 한번 내는 일이 없었다. 어릴 때 그 어려운 살림에 잘 먹이지 못해 병났을 때 약도 제대로 못 대준 옛날일이 생각나 속상하다지만 그 시절 돈 못 벌어다 준 것이 어디 나뿐인가. 이 나라 사람들 육십 년대, 칠십 년대를 다 그렇게 살아온 것을 이제 와서 내 탓하면 어쩌겠느냐고 말이 나오는 것을 집어삼켰는데, 공연한 풍파 일으킬 일이 아니라 싶어서인 것이다. 그래도 해다 주는 음식을 마다 않고 잘 먹어주는 것만 해도 대견스럽고 고마울 따름이다.
무릇 어미 된 자는 다 그렇거니. 무릇 아비 된 자는 다 그렇거니. 산천초목을 보는데 모두가 그렇게 좋을 수 없고, 나는 새와 한 점 덜렁한 구름을 볼 때도 그렇게 기쁠 수 없다. 내 평생 이렇도록 좋은 시간을 지금처럼 길게 가져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종로 네거리에 나가 나 손자 보았소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인데, 무슨 좋은 일이 없느냐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어 야속했다. 엊그제는 친구 전시회에 갔다 오랜만에 여성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만 딸애가 아기 낳았다는 말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다들 우리 집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서 그리된 것인데, 이것도 노인네 주책이 아닌가 싶었다. 어디 할아버지 된 사람이 나뿐이란 말인가.
내일 모레면 세이레가 된다. 잘 먹고 잘 자고 무럭무럭 자라거라. 탁 트인 하늘에서는 오늘도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모과나무 열매는 날이 갈수록 어여쁘고, 대추는 빨갛다 못해 자줏빛으로 익어갔다. 들녘에 벼이삭은 감격의 합창을 부르고 있으렷다. 층층대대 조상님네 굽어보시고 외가에 또 외가까지 뭇 어른들이 지켜보시는데 태어나는 모든 새 아기를 위해 기도하자. 이 생명의 신비 앞에서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모자상을 만들 준비를 한다. 이제는 작품이 좀 풀리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인데, 이 조짐이 무엇인지 아직은 짐작도 안 가지만 일하는 가운데 가시화될 수 있을 것 같다.
단풍이 어드메쯤 왔을까. 들녘에 꽃들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내일은 일요일, 사위를 불러 바깥나들이를 할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