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까다로운 대학원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보려던 내 모험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느낌이 든다. 무식이 용감을 낳는다고 하지 않는가? 무식하게 대학원 석사과정에 덤벼보기로 한 것이다.
호주대학교의 제도는 한국과는 달랐다. 당시 한국에서는 대학교-대학-학과 체제로 움직이는 학사운영제도라면, 호주 NSW대학교는 대학교-학부-학과 체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NSW대학교에서는 공업화학부(Chemical Technology) 밑에 세라믹 공학(Ceramic Engineering) 학과가 있었다. 바로 내가 더 공부할 수 있는 학과였다. 학과장은 매커트니 교수(Professor Eric McCarteney)로 되어 있었고, 학과 교수는 4명 정도였다. 대학교의 위치는 시내에서 아주 가까운 캔싱톤(Kensington)에 있었다.
NSW대학교로부터 면담 허락
주말을 이용하여 나는 식구들을 데리고 NSW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NSW대학교는 한국의 대학 규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컸다. 내 영어실력으로는 전화로 입학 문의하는 자체가 어려워서 회사 여비서에게 NSW 대학교에 관한 자료를 주며 학과장인 매커트니 교수님께 내 입장을 잘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짧은 편지를 보여주었다. NSW 대학교 매커트니 교수님께서 그녀에게로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월 ○○일 ○○시에 면담하자는 아주 간단한 통지문이었다.
공장장은 여전히 명쾌한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공부를 계속하든 안 하든, 교수님과의 면담은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장장과 가부를 확정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차마 입에서 학교 건에 관한 말이 나오질 않아서 업무보고만 마치고는 그날은 그냥 나와 버렸다.
교수님과의 면담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교수님부터 면담하고 나서 그다음 일을 처리하기로 하고 면담 일에 잇몸치료를 이유로 일찍 조퇴하여 NSW 대학교 캠퍼스로 서둘러 갔다. 면담시간에 맞춰 교수님 방에 들어갔더니 교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분의 첫인상은 매우 매서웠다. 눈동자가 살아 움직였으며 몸은 호리호리했다.
교수님께서는, NSW 대학교에 학사-석사-박사과정이 있는데, 내 경우에는 곧바로 석사과정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한국 대학 졸업을 호주에서는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같은 외국인들을 위한 특별과정을 먼저 통과해야만 정식으로 석사학위(Master Degree) 과정을 공부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외국인을 위한 학사인증코스(Qualifying Programme)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그 과정의 각 과목 점수가 평균 Credit(70점) 이상이 되어야지, Pass(60점) 정도로는 석사과정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안타깝게 한국의 대학 졸업은 승인되지 못해
참으로 기가 막혔다. 한국을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나라로만 알고 계셨다. 더욱이 한국의 4년제 대학교 졸업을 인정할 수 없다니! 실망을 넘어 절망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4년 동안 대학등록금을 어떻게 납부했는데….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교수님께서는 이어, 학사자격 인증을 위한 입학사정이 내년(1973년) 1월 30일까지니까, 원하면 원서를 내보라고 하셨다.
내년에 원서라도 내보라고 하신 것은 그래도 내게 가냘픈 희망 한 가닥을 안겨주신 거였다. 너는 자격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학사인증 과정에서 적어도 Credit을 받으면 석사, 박사 과정도 가능하다는 뜻이 아닐까? 막연하면서도 무언가 실마리가 풀릴 듯한 느낌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학사인증 과정에 일단 덤벼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내년 1월이면 시간이 급했다. 한국의 대학교 졸업장과 성적증명서를 빨리 보내달라고 서울의 집에 연락했다. 나는 회사에 정상 출근하여 내 업무를 계속했다. 공장장은 여전히 명쾌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대학원에 가는 것을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서울에서 두 가지 서류가 왔으므로 때에 맞춰 접수할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1973년 1월 중순쯤 교수님의 비서로부터 간단한 편지가 왔다. 학사인증 과정에 등록하려면 1월 30일 이전에 원서와 기타서류를 제출하라고 씌어있었다. 그 당시 호주에서는 대학등록금이 없었다. 각 대학교는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재정 부담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내게도 등록금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공장장의 허락을 받는 일이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덤벼보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교수님 비서의 편지를 들고 공장장 방으로 들어갔다.
원서와 기타 서류를 제출하라는 통지가 와 진학의 희망
물론 그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회사 여비서에게 그 편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축하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유는, 그 편지가 오기까지 아마 교수님의 메모가 필요했을 텐데 교수님의 메모를 받는 자체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호주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기술전문직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하지, 대학에 입학하지 않는다는 것과 대학에 진학해도, 자의든 타의든 절반 정도의 학생이 탈락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탈락을 잘 시키는 교수님께서, 그래도 무언가 남다른 느낌이 있었기에 등록 권유 메모를 보내왔을 거라며 축하의 의미를 해석해 주었다.
그녀의 해석대로라면 무모한 ‘덤벼’임이 틀림없었다. 한국에서 별로 배운 것도 없고 호주생활 겨우 2년 동안 영어실력이 크게 향상된 것 같지도 않은데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이, 그것도 직장 일을 줄이면서 덤벼본다는 것이 큰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했다. 만약 회사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그때 대처하기로 했다.
회사 여비서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느꼈고, 그녀에게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자기가 먼저 공장장을 만나서 내 대학원 진학 건에 대해 설명할 테니, 그 후에 공장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공장장 방에 들어가서 교수님의 메모지와 기타 대학교 진학 원서를 보여주며 같은 부탁을 했다.
회사로부터 허락을 얻어내
공장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것은 사장님과도 이미 나에 관한 얘기를 마쳤음이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회사 여비서도 내 얘기를 했을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렇게 해도 되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공장장이 긴말은 하지 않고, 회사업무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며 회사규정대로 하루 결근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결국, 대학원 진학을 인정해 준 것이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공장장에게 ‘회사업무에는 절대 소홀하지 않겠으며, 매일 1~2시간씩 더 일을 해서라도 일주일에 40시간을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공장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1~2시간 더 일할 경우, 연장근무 수당(Over time Charge)을 지급해야 할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회사 여비서가 처음 알려준 그대로였다. 대학원에 출석하는 8시간도 근로시간으로 인정한다는 노동법의 혜택을 나도 받게 된 것이었다. 누가 이런 사실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비서를 통해 알게 하심이었으며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