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생활은 여전하였다. 회사에서 틈만 생기면 강의노트 외우는 일, 현진이와 놀아주는 일, 주말이면 L 씨 댁에 가보는 일, 일요일에 예배 참석하는 일 등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학사인증과정 평가 결과에 따라 내 인생 진로가 달려
그렇게 해서 2학기에도 숙제와 실험보고서 작성, 기말시험까지 모두 마치고 이제 학사인증과정 평가만 남았다. 평가결과에 따라 내 인생진로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참으로 길고 길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도 그런대로 잘 넘겼다. 한국 교민 몇 사람과 주말이면 공원에도 가고, 멀리 오팔 광석을 캐러 떠나기도 하고, 호주식 연말연시 휴가도 보냈다.
휴가철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 현진이었다. 아침에도 엄마, 아빠와 같이 있다는 것을 아는 현진이는 김치와 밥을 주면 언제든지 잘 받아먹었다. 틀림없는 한국 아이였다. 그 좋은 호주식 아기 음식이 있어도 그것보다는 밥하고 김치를 가장 좋아했다.
그렇게 현진이와 같이 놀면서도 나는 대학교 통지문에 목이 길게 뻗어있었다. 그때는 대학교에서 성적결과를 반드시 송부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에 무척 애가 탔지만 한편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월 중순 드디어 대학교에서 통지문이 날아왔다. 편지를 열어보려던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까? 실력도 없고 머리도 좋지 않은 내가 서울대 시험 보고 합격자 발표하던 날, 일찍 학교에 가서 발표 대자보에 혹시나 내 이름이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며 막연히 떨리던 마음과 같았다.
서울대 합격은 거의 안 될 것이 뻔했어도 혹시라도 재수가 좋으면 합격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와 온갖 억측이 가능했지만, 그 상황은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수다를 떨어가면서 브라이언 노트를 내 것처럼 베끼고 손가락에 시커먼 멍이 생길 만큼 노력도 했기에, 만일 내가 ‘Credit(학점인증)’을 받지 못해 떨어지는 통지문이라면, 내 능력이 없음을 솔직히 시인해야 하는 통지문이기도 했다.
통지문을 뜯어보니 'Credit'
내 운명이 판가름 된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봉투를 열지 못하고 있다가 아내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문을 열었다. “뜯어봐! 1년 동안 공부한 결과인데 뭐!” 아내는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봉투를 뜯어버렸다. “에게! 겨우 Credit이야?”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 다시 좀 봐!” 내 목소리에는 어느새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아내는 이른바 일류 숙명여대 영문과 출신이다. Credit 정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내 목소리가 더욱 힘찼다. 아내가 내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틀림없는 ‘Credit’이었다. 와! 이제는 살았다. 이 6글자를 얻기 위해 현진이도, 아내도, 나도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자세히 읽어보니, 4개의 세부 제목의 평균점수는 70～80%라고 적혀 있었고, 1974년 3월, 공학석사(Masters of Science) 학위에 Admission(인증)이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이제 가느다란 희망과 함께 나의 ‘덤벼 인생’을 실감 나게 해준 기적 같은 편지였다.
덤비면 길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순간이었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양쪽 집에서 열심히 중보기도로 뒷받침해주신 분들께 감사하였고, 매일 아침마다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부짖은 현진이가 견뎌준 것도 고마웠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걱정 말라고 나를 격려해주는 아내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 아내에게 ‘Credit’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석‧박사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학위 인증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통과되더라도 최하 ‘Credit’을 얻지 못하면 석·박사 과정에 입문할 수 없다고 일러 주었다. 별것 아닌 걸로 생각한 ‘Credit’이 그처럼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내는 놀라고 있었다.
1974년 1월 1일, 내 인생의 전환을 맞는 계기
그렇게 1974년 1월은 내 인생계획의 전환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고, 현진이에게는 좀 더 고생하라는 통지문이었으며, 아내는 그래도 남편이 그렇게 미련하고 멍청한 놈은 아니라는 인정서를 받은 셈이 되었다.
동시에 공장장에겐 ‘저놈이 말도 잘 안 되는 놈이, 실력도 없어 보이는 놈이…, 설마 그렇게 까다롭다는 매커트니 교수 시험을 통과했겠는가?’ 했다면 그런 인식을 불식시키는 증명서도 되는 셈이었다.
나는 ‘Credit’ 편지를 회사 여비서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얼른 인사치레 말을 건넸다. “난, 그렇게 될 줄 알았지!”
무엇을 근거로 내가 통과될 줄을 알았단 말인가? 전형적인 영국인들의 외교적 재치로 여겨졌다. 영국인들은 속으로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운 일이 있어도 실력행사를 하기 전까지 겉으로는 좋게 표현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회사 여비서는 그렇게 전형적인 외교스타일의 인사치레 말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그 이유로는 내 실험실에서 수많은 필기 연습지를 직접 목격했고, 틈만 나면 두 손가락으로 보고서를 타자하는 것도 보았고, 조금도 쉴 틈 없이 노트 들여다보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회사 여비서도 공장장도 축하해주어
호주인들은 나처럼 무자비하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생활도 그렇게 쪼들리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다. 집이 없으면 랜트(Rent)로 지내면 되고, 자가용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 매월 얼마씩 갚아나가고, 휴가철이 되면 어김없이 어디론가 휴가를 즐기기 위해 떠나버리고, 직장을 잃으면 실업수당이라는 정부보조금을 받게 되니까 직장이 없어도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손가락에 멍이 들도록 공부하는 것은 멍청이들이 하는 행동으로 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원래 부잣집 자손들이 악착같은 생활을 할 줄 모르듯이 호주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악착성을 갖고 생활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까다로운 대학교 졸업이 그들에게 절대 절명한 인생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런 점들이 내가 그곳 대학교에서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장장에게 지난 1년 동안의 학위 인증과정에 관한 결과를 보고했다. 공장장은 축하인사를 해주었다. 나는 그동안 도와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그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어서 3월 초에 정식으로 석사학위 과정을 등록했다. 등록을 마치고 매커트니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은 여전히 차갑게 인사를 건네며 여러 가지 얘기를 하셨다. 대화내용은 석사과정 자체가 실험연구를 통해서 논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대학교 학위위원회에 제출하여 심사에 통과되면 학위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