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Thesis)! 들어는 보았지만 무엇이 논문이며,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논문을 쓰려면 주제(Subject)를 결정해야 하고 그 주제를 만족시키는 실험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지도해줄 교수를 정하는 일이 먼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교수가 결정되지 않으면 주제도 정할 수가 없어서 주제가 정해진 후에 논문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순서였다. 따라서 논문 통과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은 주제 결정이다. 속마음은, 사회적 권위가 대단하신 매커트니 교수 밑에서 논문지도를 받고 싶었다. 그 교수 밑에서 지도받으면 앞으로 내 장래에 큰 영향을 끼칠 것만 같았으나, 첫날 교수님과의 대화로 봐서는 내 논문지도를 맡고 싶어 하시질 않았다.
매커트니 교수의 논문 지도를 희망했지만 부정적
그 이유라면 역시 나의 실력과 관계있다. 그곳 대학교 성적은 ‘수’-High Distinction(91~100%), ‘우’-Distinction(81~90%), ‘미’-Credit(71~80%), ‘양’-Pass(61~70%) ‘가’-Fail(60% 이하)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수. 우. 미. 양. 가와 같은 시스템이다. 그러한 성적과정에서 교수는 당연히 ‘수’(High Distinction)를 받은 학생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우’(Distinction) 정도는 되어야 교수 밑에서 논문지도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석되었다.
석·박사과정(Higher Degree)은 적어도 ‘수’(High Distinction)나 ‘우’(Distinction) 성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조건이다. 그런 총명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교수가 Credit 성적에,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파트타임(Part-time) 학생을 지도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은 뻔해 보였다. 그렇게 보니,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매커트니 교수의 결정이 그리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석사학위를 못 받으면 내일이 없어지는 듯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에도, 교수와의 대화 자리에서 더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고, 속이 타들어 가도 미소만은 지켜야 했다. 어찌 되었든 교수의 권위는 여전히 내 장래를 흔들 수 있는 존재였다.
‘세라믹스 이론’(Theoretical Ceramics)
나는 정처 없이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대체 논문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요업공학(Ceramic Engineering) 학과에는 교수가 세 사람 더 있었고, 강사가 한 사람 있었다. 화울러 박사(Dr.R.Fowler)는 ‘도자기 세라믹스’(Whiteware Ceramics), 프로코보비치 박사(Dr. Prokobovich)는 ‘내화요업’(Refractory Ceramics), 또 다른 교수(기억 안 남)는 ‘첨단기술요업’(High Technology Ceramics), 매커트니 교수(McCartney)는 ‘세라믹스 이론’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세라믹스 이론’(Theoretical Ceramics)이 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반도체(세미콘덕트) 개발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그 부분을 미래기술로 보았으며, 내 직장을 옮기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매커트니 교수가 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보였던 이유도, ‘세라믹스 이론’을 전공하려면 그야말로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무작정 덤벼본 내가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매커트니 교수의 제자가 되려는 생각을 어렵사리 접고, 강의시간에 그래도 인간미가 느껴지던 화울러 박사 연구실 문을 두드렸으나 굳게 닫혀 있었다.
도서관으로 가서 버딪혔으나 갈피를 잡기 어려워
또다시 도서관 행이었다. 일주일에 단 하루 허락받은 시간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뒤져 보았지만 무엇을 알고 뒤적이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처지가 황량한 바다에서 방향 잃은 돛단배 신세 같았다.
그렇게 한 달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4월, 내 직장에서 심상찮은 사건이 벌어졌다. 내가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고 다른 회사와 합치기로 결정 났다는 회사 메모가 나돌았다. 그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내가 꿈꾸고 노력해온 대학원 공부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합병할 회사는 시드니 외곽에 있어서 우리가 그 근처로 이사해야 한다면, 아내가 다니는 직장은 어떻게 될 것이며, 이제 겨우 얼굴을 익히고 현진이를 보살피는 보모는 또 어떻게 바꿔야 하는 가 등등의 걱정으로 앞날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회사가 합병될 때 내 자리가 보장되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말할 수 없는 번뇌와 고민이 겹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급하고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청했던 회사 여비서에게 이번에도 어떤 방법이 있는가를 물어보기로 했다. 회사 여비서는 내가 당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해해 주었다.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약 55세 정도) 집에서 쉬겠다고 했다. 베트 사장(Mr. T. Bett)과 의논하여 가장 좋은 길이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며 오히려 나한테 위로를 잊지 않았다.
나는 공장장을 면담하였다. 가능하면 대학원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합병하는 회사와 타협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공장장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인수인계할 때 적어도 문제 제기만은 해달라는 뜻이었다.
회사의 합병으로 직장과 공부가 불투명해져
아내와 나는 걱정을 넘어 속이 썩는 듯 한 시간을 보내며 몇 날을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했다. 우리끼리는, 만일 합병하는 회사가 직장을 계속 허락해주면 따라가되, 대학원 학생신분이 허락되지 않을 경우에는 회사를 사퇴하고라도 내 석사학위가 끝날 때까지 아내가 직장을 다니기로 계획을 세웠다. 공부하는 동안 나도 어디든 적절한 시간제 일을 하면 생활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란 글자 그대로 접시 닦는 유학생들 생활과 다를 게 없다.
며칠 후 사장이 자기 방으로 나를 불렀다. 호주생활 전선에서 4년 남짓 되어가는 시점이라, 영어 대화실력이 늘어 전보다 의사전달이 수월한 것은 사실이었다. 태도 역시 그전보다는 유유해졌다. 나는 사장실에 들어섰다. 사장은 평소와 똑같이 나를 안심시켰다. 사장은 회사의 합병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사장은 나의 대학원생 신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베트 사장이 관여하고 있는 회사는 3곳이었다. 지금 합병하는 피지에이치(P.G.H)는 시드니 중심에서 약 60km 떨어져 있었고, 주로 집 짓는 벽돌(Housing Brick)을 생산하였다.
또 한 군데, 시드니 시내 중심가에서 가까운 매릭빌(Marrickville)에 위치한 회사에서는 영국의 Ceramics 제조회사와의 기술협력으로 위생도기(Sanitary Ware)를 생산하며, 지금 내가 소속된 부스용 벽돌(Booth Bricks)회사에서는 제철공장에 공급하는 내화물(Refractory)을 생산하였다. 내가 소속된 회사 제품과 피지에이치(P.G.H) 회사 제품이 거의 유사한 생산 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경영상 합병했다는 것이다.
베트 사장은 내가 대학원 과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합병 회사와 협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 배려를 하기 까지 분명히 회사 여비서의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회사 경영구조로 볼 때, 사장이 받아들이라 한다고 무조건 따르는 하부조직이 아니다. 하부에서도 그들 나름대로 사람이 필요치 않으면 얼마든지 ‘NO’를 하여 거절한다. 이렇게 내일이 불확실한 처지에서 논문 주제를 걱정하는 것 자체는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