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주제는 이상적인 미래 신기술 연구보다 당장 시험실에서 할 수 있는 어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시간도 절약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어느 날, 나는 화울러(Fowler) 교수에게 내 논문 지도교수가 되어 주십사고 정식으로 청해보았다. 화울러 교수는 크게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화울러 교수를 만나 이번에 매릭빌(Marrickville)에 위치한 화울러 포터리라는 회사로 직장을 옮긴 경위와 새 직장에 도움이 되면서 내 공부도 쉽게 진행할 수 있는 논문 주제를 선택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화울러 교수에게 지도교수 부탁
키가 아주 작고 백발이 성성한 화울러 교수는(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한테, ‘그 회사 이름이 자기 이름과 같고, 본인의 전공이 Whiteware(백색 도자기) 이기도 하고, 호주에서는 그 계통의 산업이 많지 않으며, 그것을 전공해봤자 장래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고 했다. 그러면서, ‘그 회사의 연구부장인 햄머 씨(Mr. Hammer)와 최고책임자인 잭 스론 씨(Mr. Jack Sloane)도 잘 알고 있으니, 만약 내가 원하면 지도교수로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다.
미래 하이테크 세라믹스(High Tech Ceramics) 분야가 아니라는 것에는 그런대로 나도 불만이었지만, 당장 현실적으로는 회사의 문제를 주제로 정하는 것이 내 대학원 졸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우선 학위를 받는 것이었다. 석사학위 졸업을 하게 된다면, 그다음 문제는 그때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화울러 교수를 찾아가서 내 지도교수가 되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사실 화울러 교수는 학과 내에서 그리 인기 있는 교수는 아니었다. 대학원생들이 대개 매카트니 교수의 지도를 받고 싶어 했고, 다음으로는 프로코보비치 교수였다. 대학원생들이 그를 선호하지 않은 이유는 학생들의 장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즉 화울러 교수의 백색 도자기 전공으로는 장래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교수와 매카트니 교수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런 비인기 교수 밑에서 많은 시간을 얻는 것이 내게는 다행일 수도 있었고, 어쨌든 빨리 졸업하는 게 목표인 나로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매카트니 교수는 만나기도 어렵지만, 화울러 교수는 문만 두드리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사실 지도교수라고 해서 학생을 붙잡고 온종일 지도하는 것은 아니다. 실험도 내가 하고 연구도 내가 하는 것이다. 지도교수의 역할은 내가 연구하는 방향이 적절한지를 판단해주는 것이다. 실험계획만은 지도교수의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호주에서 채광되는 점토를 활용하는 방안
두어 차례 화울러 교수와 논의한 결과 논문 주제가 결정되었다. 논문 주제는 호주에서 채광되는 점토들을 활용하여 영국이나 독일에서 수입하는 특수 점토를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호주에서 많은 점토가 채광되고 있지만, 특수한 백색 도자기를 제조할 때는 채광한 자연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위생도기(Sanitary Ware), 자기(Porcelain), 본차이나(Bone China) 등 특수한 제품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그 제품에 적절한 인위적 혼합점토(Blending Clay)를 사용한다. 혼합점토는 두 개 이상의 점토를 혼합해 하나의 점토로 만들어 목적물에 적당히 넣어주면 생산 효과가 뚜렷하기 때문에 영국이나 독일에서 수입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던 그 회사도 상당량을 영국에서 수입해 사용하므로 회사로서도 싫어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큰 용기를 내어 회사에 들어가서 상급자인 론 베이리 실장에게 논문 주제를 설명했다. 그 역시 실험이 성공하면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거라며 동의해 주었다.
사실, 그 실험을 선택한 더 중요한 이유는 회사 실험실에서 할 수 있으니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품질관리실보다는 연구개발실로 옮기면 된다. 그래서 론 베이리 실장에게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논문준비는 시작되었고, 밤이든 주말이든 논문을 위한 실험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마음으로 시간이 나기만 하면 바삐 서둘렀다.
여러 가지 점토를 특수한 하나의 점토로 혼합하려면 무엇보다도 점도기(Viscosity Tester)가 필요하다. 점도기란 여러 가지 점토를 혼합할 때 물로 반죽하여 그 반죽의 정도를 확인해보는 기계이다. 점토혼합물의 점도(Viscosity)가 맞지 않으면 거대한 기물(예: 위생도기)을 제조할 때 형틀(Mould)에 주입할 수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시간에 맞춰서 점토혼합물의 점도를 시험하고, 그 상태를 기록하여 종합적인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내가 매일 품질 관리하는 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논문 실험방향에 대한 자신감
그런 조건 덕에 논문 실험방향을 잡는 데 있어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필요하면 회사 내에서 간단한 실험을 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본시험 전에 예비실험을 할 수가 있었다. 연구개발실에는 실장을 비롯하여 세 사람의 연구원들이 있었다. 이들도 이민자들이어서 영국 사람들만큼 영어실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특히, 연구원 중 한 사람은 내가 시간제로 대학원 공부하는 것을 너무나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부러움을 사는 것만으로도 내 체면을 어느 정도는 세울 수 있었다.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으려면 내가 겪는 그런 고충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그 연구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점토혼합물에 관한 자료들을 연구원들에게서 받아 집에서도 읽어볼 수도 있었던 것이 논문작업의 진척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연구원들 사이에서 기술적인 의견충돌이 생기면 내 의견을 물어올 때도 있었다.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석사학위 공부하는 내 지식에 대한 기대 때문일 텐데, 정작 나는 그 질문에 충실히 답변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한편, 내가 대학원에 다니는 것에 대해 그들이 가볍게 보지 않고 있다는 것도 그때 강하게 느꼈다. 학문을 하는 과정은 어렵지만, 그 과정을 마치면 그만큼 대우해주는 그 사회의 풍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