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쁘기도 하고 한편은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7년이 넘도록 외국 생활을 하고도 결국 빈 가방과 빈손으로 한국에 가는 내 신세에 대한 불만이었다. 호주로 떠나지 않고 D공전 교수로 남았더라면 7년이란 세월 동안 이민자의 삶을 살며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그때 나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와 닿았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백인사회에서 돈 없이 고생하는 이민자들에게는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7년여의 세월이 흘러가버린 후에야 그런 신세타령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나한테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는가?
나에 대한 여러 가지 후회와 격려가 교차하는 동안 비행기는 홍콩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아,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다본 서울!
내가 무슨 애국자도 아니지만, 서울 땅에 입을 맞출 만큼 반가웠다.
공항에는 행남사의 우 부장님이 나오셔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우리는 일급 호텔인 롯데호텔에 투숙하였고, 다음날 목포로 갈 시간도 정했다. 도착 당일 저녁에는 우 부장님께서 최고급 한식집의 음식을 대접해 주셨다. 그런 식사를 해본 지도 7년여 년 만이었고 5성급 호텔에 투숙한 것도 처음이었다. 호텔은 으리으리했으며, 방에 들어서자마자 수십 통의 전화 메시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내가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가슴벅찬 고향방문
곧바로 장인, 장모님께 전화했더니 너무나 반가워하셨는데, 딸의 고생스러움에 말문이 잘 열리지 않는 듯도 했다. 임신 중인 딸의 안부는 물론, 한인 장로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도 궁금해하셨다. 나는 두 분을 안심시키며, 목포 일을 마치는 대로 찾아뵙겠다고 약속했다. 형님과 동생들한테도 연락했더니 깜짝 놀랐다. 그들의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시간 나느냐’고. 우리 형제들은 주로 호주에 계시는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고, 그들도 차츰 호주로 이민 갈 기대를 하고 있던 터라, 더욱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이튿날 목포행 새마을호 기차에 몸을 실었다. 1960년도에는 완행열차로 서울과 목포 간에 15시간 걸렸지만, 그때는 새마을호로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상당히 많이 단축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드디어 고향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역은 많이 변하지는 않은 듯했다. 목포역에서 우리를 맞아주신 분은 김준형 회장님의 장남인 2세 경영자였다. 그분의 직함은 전무이사였는데, 김 회장님 다음 서열이었다.
김 전무님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셨고, 그때는 회사 경영에 뛰어들어 모든 것을 이끌어가고 계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하고 같은 고등학교 1년 선배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동향에다 같은 학교 동문이면 무척 가까운 사이다. 나는 금세 김 전무님과 가까워졌고 부담 없이 대화할 수가 있었다. 고향에서 저녁 식사도 아주 훌륭하게 대접받았다. 음식 맛도 고향 맛 그 자체였기에 내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내가 언제 호주로 이민을 떠났던가 싶을 만큼 모든 것이 즐거웠다.
행남사 김준형 회장이 따뜻하게 맞아주어
그날은 그렇게 일박하고 이튿날, 행남사 본사에서 김준형 회장님을 뵈었다. 회장님께서는 소탈하게 웃으시며 아들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마치 몇 년 동안 잘 알며 지내온 사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뵙자마자 우리 부모님 안부부터 물어보시며 “한국에 있는 동안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살펴라.”라고 아들인 김 전무님에게 말씀하셨다.
쿠퍼 사장에게는 행남사의 호주시장 진출에 관심을 표하시며, 앞으로 호주 광산업에도 진출할 계획이 있다고 하셨다. 특히, 장석(Feldspar) 광산과 백토(Kaolin) 광산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셨지만, 자료가 없어서 세심한 질문에는 답변할 수가 없었다.
김 회장님께서 그런 질문을 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분께서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로 ‘행남사의 주력 상품에는 본차이나(Bone China)라는 것이 있는데, 고급 본차이나를 제조하려면 질 좋은 백토를 확보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본차이나를 제조할 때 반드시 백토를 혼합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점력(粘力)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 소성(Firing) 후에도 흰색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흰색으로 남아 있으려면 백토 자체에 철분(Fe)이 없거나 철분의 농도가 낮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백토에는 철분이 들어있기 때문에 좋은 백토를 선택하는 것은 질 좋은 본차이나 제조를 위해 꼭 필요하다’ 고 설명하셨다.
행남사의 호주시장 진출 모색
사실 점력이 높고 철분 함량이 적은 백토는 희귀한 비금속 광물이며, 생산지가 세계에서 몇 군데에 불과하다. 미국의 ‘조지아백토’나 뉴질랜드에서 생산되는 이른바, ‘NZ 카오린’ 정도이다. 본차이나가 주력 상품인 행남사는 일본에 있는 무역회사(가토무역?)를 통해 백토를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 무역회사는 품질 좋은 광물을 뉴질랜드에서 수입하여 거기다 막대한 이익을 붙여서 행남사를 비롯한 한국 회사들에 독점적으로 판매했다.
김 회장님께서는 이어 “비싸더라도 조달만 잘된다면 수입하고 싶은데, 때때로 일부러 공급량을 조절하며 가격을 인상시킨다. 가격을 인상해주지 않으면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좀 풀고 싶다.”라고도 하셨다.
즉, 행남사에서 뉴질랜드 회사로부터 직수입을 하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일본 회사와의 계약서 때문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라는 하소연과 함께 “백토(카오립) 조달 문제를 좀 해결할 수 없겠느냐?”라고 강조하셨다.
문제는 행남사와 일본 무역회사 간의 계약서이지, 행남사와 K.C 회사가 공급 계약을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K.C 회사에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문제의 핵심을 보건대, 그 일은 뉴질랜드 회사에 나 같은 제3자가 개입하면 해결될 듯했다. 그때 우리가 행남사를 방문해야 했던 가장 큰 목적이 이것임을 알아차렸다. 세상을 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면 그 문제는 풀리기 마련이다.
행남사와 K.C 회사 간의 협력관계 교섭
우리가 호주에 돌아가서 그 문제를 최대한 협력하겠다고 김 회장님을 안심시켰다. 이윽고, 김 회장님은 전화로 회사 간부 두 사람을 회장실로 불렀다.
한 사람은 P 연구개발 부장이고, 또 한 사람은 C 기계부장이었다. 기계부장은 나하고 같은 학교 2년 후배였고, 연구개발 부장은 대학은 달랐지만 나와 나이가 같았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 내부를 살펴보았다. 공장 규모가 그야말로 대단했다. K.C 회사의 몇백 배에 달했고, 내가 다녔던 화울러 회사보다는 몇십 배 규모의 아주 거대한 공장이었다.
내 어깨가 으쓱해지고 속이 시원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거지 같이 못 사는 나라로만 여기던 호주 백인 앞에서 내 가슴속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속에 뭉쳐있던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내 어깨는 더 올라가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다닌 쿠퍼 사장도 그 어마어마한 공장 규모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Good! Wonderful’!을 연발했다.
쿠퍼 사장의 관심사는, 행남사 제품을 수입하여 호주 시장에 파는 것과 가능한 앞으로 호주의 백토 광산에 행남사의 투자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때 내 마음은, 행남사와 K.C 회사 간의 사업성공 여부 보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크게 기지개를 켤 수 있는 보람된 순간의 만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