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첫 주에 나는 첫 수업을 시작했다. 아직도 교수가 아닌 교수자격으로 교단에 섰지만, 마치 내가 전임교수인 걸로 착각될 만큼 열과 성의를 다해 강의했다. 오랜만에, 그것도 20여 년 만에 강의를 하니 모르는 것도 많고 사실 자료도 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강의를 하려면 내 교재를 새로 만들어야 할 입장이었다.
일주일에 3시간 강의를 맡았으니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3시간은 기본 의무였으나 H 교수님은 6시간 강의를 요구하셨다. 교수 연구실도 없고 도서관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주일에 6시간 강의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해 6시간씩 강의를 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내가 세운 목표를 위해 여기저기 많이 덤벼도 보았는데, 이제 내 덤벼가 결승점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느꼈다. 6시간 강의가 무척 힘들고 맥이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그동안 나는 참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씩씩하게 덤벼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던가!
학교 강의를 준비하며 가장 불편했던 점은 도서관 출입이 아직은 제한되어 있어서 강의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고, 호주에 있던 내 사무실처럼 참고 서적이 내 자리 옆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한 학기 중반에 이르렀다, 호주에 있던 아내는 한국에서의 교수임용 가능성을 묻곤 했지만, 나는 내 장래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생활비는 아내의 급여에서 웬만큼은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내 수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전임교수가 되지 못하면 언젠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시기였다.
그러나 믿는 것들이 있었으니, 그중 첫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심과 수강생들의 질문이 많았다는 점이다. 나를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고, 한편 새로운 분야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강사료는 아주 적었다. 그 돈으로는 호주 생활비는 고사하고 내 자취생활비도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한 학기를 마치게 되었다. 중간고사와 학기말 시험이라는 단어들을 20여 년 만에 들으니 느낌이 새로웠고, 그 시험들 역시 잘 끝냈다. 한 학기 강의를 끝낼 무렵, 신임교수 모집광고가 발표되었다. H 교수님의 나에 대한 사전테스트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전임교수가 될 수도 있는 기회가 온 것 같았다.
한 학기 강의를 끝내고 나니 자신감도 좀 생겼다. 내 강의내용이 산업폐기물을 자원화하는 아주 특수한 개척분야인 데다, H 교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야였기 때문이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해도 내가 이미 강의한 부분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수임용 공고에 응했다. 두어 차례 면접을 거친 후 최종 임용자로 선정되었다. 아! 한국을 떠난 지 22년 만에 드디어 내 목표를 이룬 것이다. 교수임용이 결정된 날은 1992년 9월 1일이었다.
C 대학교 재단이사장님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C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고? 그때 내 나이 50세였다. 한국에서 그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내 ‘덤벼 정신’이 이루어낸 값진 성과를 떠올리는 순간, 머리가 뱅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신임교수들의 나이는 대개 35세 전후였다. 그런데 내 나이 50세에 신임교수가 되다니! 그 일 만큼은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호주에 있는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렸더니, 아내 역시 하나님의 역사로 돌렸다.
그때부터 나는 만 16년 동안 학생들과 어울리며 학교생활을 즐겁게 보냈다. 산업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정부기관에서 의뢰하는 평가에도 참여했다.
한국에서 생활하던 1995년 6월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금(현재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생존해 계신다. 나는 몇 년 전에 정년퇴임을 했다. 현진이는 호주 시드니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노동관리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지금 회계사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명진이는 시드니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다음, 영국 런던 정경대학원(LSE)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호주금융감독원에 재직 중이다.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힘든 여정이었지만, 덤벼볼 세상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하는 아내도 이제는 4명의 손자와 손녀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는 건강하게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에 함께 가자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제 노년을 맞아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보려고 노력 중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느새 이렇게 노인이 되었나? 웃으며 푸념도 한다. 어쨌든 노년의 시간도 흘러가고 있다.
내 ‘덤벼 인생’에서 늘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장 6절의 성경 말씀으로 지난날을 조용히 되새겨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