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
내가 숭실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 세브란스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고 입원 중에 교수가 되기를 소망했고, 또 그 와중에 미국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때는 결혼은 미국유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대학원 다닐 때나 연구조교 때 그룹 데이트는 몇 번 했지만, 연애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교부 유학시험과 미국대학으로부터의 입학허가문제 때문에 나의 유학은 예상보다 훨씬 지연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해볼수록 고학이 예상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를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배우자를 관심을 갖고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처럼 고학으로 미국유학의 꿈을 지니고 있던 미혼 남자들은 미국에서 직장을 얻기가 쉬웠던 여성들로 약사, 간호사와 의사를 선호했다.
대학 3ㆍ4학년 때 생긴 위장병과 공부, 조교, 가정교사 및 유학준비 등으로 무척 바빴던 대학원생활로 나의 몸무게는 35kg밖에 안되었다. 무엇보다 웃지 못할 일은 나는 그 당시 뚱뚱한 사람일수록 건강한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날씬한 여자들은 전부 몸이 약한 것으로 생각하고 결혼대상에서 제외했다. 버스 안에서 가끔 뚱뚱한 젊은 여자를 보게 되면 호기심을 갖고 그 여자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내려 뒤를 쫓아간 적도 몇 번 있었을 정도였다.
뚱보 아가씨와 홀쭉이 총각의 로맨스
나는 신촌 부근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10여년 동안 하숙생활을 했다. 하숙을 전문으로 하다시피 한 가정에서는 방을 여러 개 만들어서 계획적으로 연세대생과 이대생을 섞어 하숙과 자취방을 세놓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학원 재학시절의 하숙집에는 연세대 남학생 6명이 하숙을 했고, 이대 약대와 의과대학에 다니던 대구에서 온 자매가 자취를 하고 있었다. 둘 다 뚱뚱했지만, 그 당시 약대 4학 년이었던 언니는 그때까지 내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뚱뚱한 여자였다.
아마 이 아기씨의 몸무게가 100kg쯤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연세대 하숙생 가운데 군복무도 마치고 대학원에 다니는 나만 나이가 20대 후반이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20대 초반인 학부생들이었다. 짓궂은 학생들은 공공연하게 뚱보아가씨를 탱크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이 아가씨는 내가 결혼상대로 원하는 모든 이상 조건-건강, 적당한 키 및 전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서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여름방학 직전 하숙집 가까운 다방에서 몇 번을 만났고 내가 미국유학을 생각하고 있으며 결혼상대를 찾고 있다는 것을 모두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아가씨도 학교가 늦어져서 다른 동급생보다는 나이도 많고 부모의 재촉으로 결혼상대를 찾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면서 며칠 후에 대구의 집으로 내려가는데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온 천하를 얻은 것처럼 내심 기뻤다. 그러나 자기는 영어는 잘하지도 못하고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란 말을 듣고는 다소 실망을 했지만, 겸손의 말로 생각하고 그 점은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며칠 후에 대구로 함께 가기를 약속은 했지만 우선 입고 갈 옷이 없어서 큰 걱정이 되었다. 고학할 때라 입을만한 옷도 별반 없었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중고품을 사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나한테는 살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할 수 없이 친구의 양복을 빌려 입고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키와 체격이 나보다 너무 커서 친구의 양복을 입고 거울을 본 나와 그 친구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웃음을 참을 수 가 없었다.
이 친구는 그 당시 아주 인기가 있었던 고바우라는 만화에 나오는 사람 같으니 그냥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가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배우자로서 최고 이상형의 아가씨 집에 가는데 양복을 안 입을 수도 없었다. 나한테 맞지 않은 옷을 입었는데도 이 뚱보아가씨는 몹시 즐거운 표정을 해서 나의 여행은 무척이나 고무적이었다.
아가씨의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는 동안, 그녀의 부모들은 여러 가지 고문형식의 질문을 했는데 대부분 내가 무슨 병에 걸리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들이었다. 하기야 젊은 사람이 키 165cm에 몸무게가 35kg밖에 안되었으니 무슨 중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가씨 부모의 반대로 결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내가 머물고 있던 친척집으로 오면서 들려준 그녀의 말은, 자기는 나를 좋아 하는데 부모들이 너무 반대해서 부모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결별의 전언이었다. 큰 낙심을 하고 대구를 거쳐 고향인 문경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불과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자매는 다른 집으로 서둘러 이사를 했고, 하숙집의 식구들과 하숙생들은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뚱보와 홀쭉이의 결혼은 불발로 끝났고 그 충격으로 나는 너무 억울해 며칠을 두고 소리 내어 울었다. 아마 중3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만큼이나 그렇게 울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같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결혼은 하지 않기로 내심 굳게 결심하고 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만약 그녀 집에서만 좋아했으면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말렸어도 나는 그 아가씨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로써는 나의 일생에서 제일 좋아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무조건 뚱뚱하면 건강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라는 것을 아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나는 지금까지 ‘영어도 못하고 여러 가지 질병과 관계가 있는 뚱보와 결혼했으면 나의 공부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방해되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도 가끔은 지녀보았다.
누구나 젊은 한 때, 결혼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한두 가지 틀린 선입견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상의도 않고 조급하게 결정하면 일생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인생의 결정은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은 후에 결정해야 한다.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은 이 탱크 아가씨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아직도 병약한 나에 대한 인상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뚱보 아가씨와 홀쭉이 총각은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홀쭉이 총각은 몸이 뚱뚱할수록 건강한 것으로 착각 했고 뚱보 아가씨는 몸이 날씬할수록 허약한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내와 축복된 결혼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이가 30이 넘은 데다 미국에 가는 것도 계속 늦어지자, 결국은 결혼을 하고 미국에 가기로 작정하고 결혼할 아가씨를 물색하게 되었다. 1966년 겨울 방학 때 박기혁 은사의 사모님(이창희) 소개로 현재의 아내와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농업을 전공한 박 은사와의 소중한 인연은 내가 농협에서 몇 개월 근무하고 대학원에 복귀했던 1963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경제학과의 학과장인 박 교수는 나를 경제학과 조교로 채용했고 이때부터 몇 년 동안은 그의 모든 원고를 내가 손질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대학과 대학원 공부는 미국에서 했기에, 교수 생활 초기에는 한국어가 서툴러서 나의 도움이 다소 필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 교수의 첫 번째 교과서 <농업경제원론> 원고를 정리하던 1965년 초에 나는 박 교수 댁에서 3개월 동안 숙식을 함께하면서 도와드렸기에 나에 대한 모든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내 아내는 박 교수 누님의 따님이었기에 급속도로 진전되어 결혼은 소개받고 몇 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큰아이는 강릉에서 태어났는데 한국 이름은 기강이다. ‘기’자는 우리 집안의 돌림자이고 ‘강(江)’은 강릉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이 무렵 박 교수는 새문안교회 장로로 시무하였고, 영어도 잘하고 또 연세대학 경제학 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그를 관동대학 이사로 영입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한동안 관동대학 경제학 교수들은 나를 비롯해서 전부 박 교수의 제자들이었다.
물론 내가 관동대학에 취직한 것과 결혼을 한 것도 전부 박 교수가 주선한 것이었다. 그는 1969년 11월에 관동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했는데 나는 유학 준비관계로 취임식에 참석을 못한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 은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동안의 도움에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