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200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

꿈이 이루어지다

내가 1963년부터 그렇게 원했던 미국유학의 꿈이 결국 이루어져서 1969년 12월 28일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수중에는 단돈 200달러를 들고 미국에 와서 6년 동안을 고학하는 동안에 수많은 고생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석사학위는 미국사람들도 위험해서 싫어하는 지역에서, 그것도 사고가 제일 많은 밤 12시부 터 아침 8시까지의 경비생활로 마칠 수 있었다. 박사학위는 청소부로 근무하면서 마칠 수 있었다.

1998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우리 가족의 한국여행 때 강릉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가 전세로 살던 집 근처에 가긴 했는데 모든 것이 너무 변해서 안타깝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 관동대학을 방문했을 때에도, 내가 근무할 때 있었던 조그마한 두 건물은 전부 없어졌고 큰 건물들이 여기저기 건립되어서 학교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교무처에 들러서 내가 1960년대 말에 관동대학에서 가르쳤다고 하고 그 당시에 혹시 근무한 직원이나 졸업생을 한두 명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더니 직원은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 옆에서 조용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직원이 그 당시 교수 한 분은 아직 강릉에 살고 계시고, 졸업생 한 명이 지금 대학원장을 맡고 있다고 해서 연락을 했지만, 통화가 안 되어 결국 만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이 바로 내가 관동대학에 근무할 당시에 성문과를 졸업하고 관동대학 교수가 된 엄창섭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그는 이 책을 자신의 책처럼 수정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방향키를 상실한 난파선에 승선하다

5․16 군사 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와 일부 장교들이 장면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이유로 청와대를 장악,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박정희는 이때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시해되었던 1979년 10월 26일까지 18년 동안 한국을 통치했다.

이 18년 기간 중 1인당 연평균 소득이 매년 6%씩 증가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은 한국이 이 정도나마 살 수 있는 것은 박정희의 개발독재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비평가들은 우리가 이렇게밖에 못사는 것이 바로 박정희의 개발독재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박 정권을 평가할 자격도 없고 또 평가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60년대 군사정권이 시대의 정신을 잘 인식하고 그들의 목표(반공과 경제개발)를 일방적으로 정해 하향식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였던 1960년대가 저물어 가던 1969년 12월에 뜨거운 가슴에 청운의 꿈을 간직하고 나는 유학생으로 마침내 ‘기회의 땅’ 미국에 도착하였다. 1960년대는 대한민국이 고도의 경제 성장이라는 국민의 숙원과 반면에 억압적인 정치와 사회적인 압제의 그림자가 공존했던 아픔의 시대다.

▲ 1969년 삼일고가와 철거민촌 아이들 모습 / 5.16군사정변 이후 급속도로 개발되는 서울의 한 단면이다

이때 한국경제정책은 국가, 은행 그리고 재벌의 긴밀한 제휴에 기인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국가가 주된 행위자였다. 또한, 억압적인 정치체제 하에서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 값싼 인력에 의해 생산된 상품을 미국에 수출하여 급속한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을 이루던 시기였다.

이 땅의 정객이나 위정자들은 고도의 경제성장과 반공의 구실로 독재정치를 정당화했고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데모를 계속했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현실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과 정부 관리들이 함께 추진했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과 미국 및 서방세계의 경제나 기술수준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컸던 때였다. 따라서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직장이나 공부를 위해서 외국으로 가기를 원했고 정부에서도 외화벌이와 고등인력의 양성을 위해서 이들의 외국진출을 적극 권장했다.

특히 1960년대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시기였기에, 몇몇 권력자나 극소수의 재벌은 예외였으나 대중은 하나같이 춥고 헐벗고 가난으로 얼룩진 궁핍한 생활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자비나 정부장학금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나처럼 고학으로 미국유학에 도전했다. 그와 같은 까닭에 고통을 감내 하며 저마다 어려운 결심을 하였으나 많은 유학생이 경제사정 때문에 꿈과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서 공부를 포기하였다.

내일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 미국행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나의 경우도 학교성적이나 영어실력, 그리고 금전 등 유학에 필요한 어느 조건도 그렇게 여유 있게 갖추지를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주위의 여건에 비춰볼 때 유학이 거의 불가능한 정황이었다. ‘야심 있는 젊은이들이여! 조국이 필요한 외화벌이와 선진 지식 습득을 위해 외국으로 가자.’라는 열풍이 젊은이들을 자극하여 취업이민뿐만 아니라 너도나도 미국유학을 원했다. 이러한 사회의 풍조에 마치 프랑스의 박물학자 자크 마르탱이 “현대인은 방향키를 상실한 난파선 같다.”는 지적처럼 삶의 좌표나 내일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 나도 물결에 밀리듯 그렇게 미국에 왔다.

장학재단의 도움이나 학비보조도 없이 고학으로 유학하는 것을 알게 된 관동대학의 선교사들이나 가까운 동료들은 공부를 마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휴직계를 내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나는 걱정해주는 주위의 고마운 분들에게 유학과정을 마치지 못하면 한국에 안 돌아올 것이고, 공부를 마치면 귀국해서 돈을 많이 받고 서울에서 교수생활을 할 결심이기 때문에 관동대학에 휴직계를 낼 필요가 없어서 사표를 낸다고 하였다.

이 무렵 갓 결혼을 하였기에 집안의 어른들이나 처가에서 모든 살림도구는 두고 유학을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나 돈이 될 만한 것은 아내의 결혼반지를 포함해서 전부 팔았고 팔 수 없는 물건들은 전부 어려운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말았다. 그러나 결혼 때 처가에서 해준 이불과 식기 등의 살림도구는 차마 팔수가 없어서 그것 을 필요로 하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그냥 나누어 주었다.

내가 이렇게 배수진을 친 이유는 관동대학에 사표를 낸 이유와 비슷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나를 믿어준 아내와 돌도 안 된 큰 아이 캔은 처가에 남겨두고, 1969년 말 미국행 서북항공사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마치 <파랑새>의 저자인 마테를링크의 “운명아, 내가 간다. 저리 비켜라.”는 말처럼 그렇게 무모할 정도의 도전을 시도 하였다. 미국에서 여러 해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고학으로 공부를 마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바로 나만의 결단에 의한 배수진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