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에서는 문명의 발전단계를 석기시대, 농경시대, 산업시대, 정보시대 및 지혜시대로 구분지어 연구한다. 첨단기술의 선구지인 미국에서도 정보시대는 1980년 중엽에 시작했으니, 내가 미국에서 고학하던 1970년대는 산업시대의 절정기로 조립대에서는 기계가 노동자의 노동속도를 조절했고 다른 곳에서는 할당제를 통해서 노동속도를 조절했다. 하루에 플라스틱 가루를 6드럼씩 만들게 되어 있었는데 나의 동료는 쉬어가면서 해도 8시간 안에 자기 할당을 다 마치고 환담을 하면서 퇴근할 때까지 쉬었다. 반대로 나는 식사시간과 공식적으로 쉬는 휴식시간도 줄여가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저 4드럼 정도밖에 못 해서 감독자로부터는 거의 매일 꾸중을 듣는 실정이었다.
비싼 기계를 망치게 하는 실수
할당량을 못 채울 것 같으면 해고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식사시간, 공식휴식시간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하루는 너무 피곤에 지친 탓으로 플라스틱 자르는 큰 가위, 자르던 플라스틱 조각과 나의 몸이 기계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위기를 겪었다. 다행히도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가위와 플라스틱 조각을 함께 놓아 목숨은 구했지만 큰 가위가 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비싼 기계를 망치게 되었다.
퇴근할 때까지 몇 시간 남은 시간에는 청소를 하고 time card을 찍고 퇴근하려는데 감독이 자기 사무실로 나를 부르더니 “I will let you go.”라고 하지 않는가? 무슨 뜻인지는 짐작했지만 나를 해고한다는 얘기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다고 했다.
이 말은 내가 돈이 없어서 모든 이빨이 흔들리는데도 그동안 미루어온 내 잇몸수술을 한 후 치과의사가 했던 “your remaining tooth will outlive you.”라는 말과 함께 내 일생에서 잊지 못할 두 가지 영어 문장이 되고 말았다. 비록 해고는 당했지만 나의 감독이었던 이 멕시코계 미국인의 기지에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별로 큰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의 얼굴은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만약 해고한다는 직설법을 사용했다면 틀림없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내 치과의사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나머지 이를 간수할 수 있다고 하기보다는 “나머지 이는 나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한 그의 기지를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죽을 때라는 표현보다는 오래 산다는 표현이 듣기에 훨씬 좋지 않은가?
이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이 속담 자체는 말을 잘해서 이득을 취하는 형태지만 보통 말을 잘 못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에 자주 쓰인다.
수 없는 해고의 연속
플라스틱 공장에서 해고당한 후 보수가 좋은 공장에 취직을 몇 번 했지만 내 할당량을 감당하지 못해서 1~2주 일하고 해고를 당하곤 했다. 나는 체격이 작고 어릴 때부터 무수한 잔병을 앓았기 때문에 약한 체질이어서, 미국사람을 기준으로 만든 공장의 노동일을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것을 이때처럼 안타까워한 적은 없다.
주로 직장은 학교 직업소개소와 신문광고 및 첫 학기 학교에 함께 다녔던 한국학생들을 통해서 구했는데, 밤낮으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직장을 구하는 데는 비교적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 뒤에도 여름방학 때 한 일은 식당 설거지 및 청소, 주유소 기름 넣어주기, 정원사 조수, 경비 및 광고지 돌리기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물론 자동차도 없었고 또 아무리 생활비를 줄이고 저축을 했지만 생각한 만큼의 돈을 저축할 수는 없었다.
주말이고 주중이고 밤낮으로 시간만 있으면 여러 가지 일을 쉴 새 없이 했기에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어서 해고를 여러 번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한두 달 일을 하고 저축한 돈을 계산해보았더니 한 과목을 택할 등록금밖에 모이지 않아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크게 상심하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를 초청
자동차도 없고, 직장도 없고, 돈도 없는 처지에 무모한 짓이라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6월 말쯤 아내와 큰 아이 캔을 미국에 초청하는 서류를 한국에 보냈다. 이때 필요한 아내초청 서류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이 재정보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 학기만 공부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온 연세대 전기공학과 동기동창인 최명수가 두말없이 보증을 서주는 덕택에 이 일은 비교적 쉽게 해결되었다.
우리는 한 학기만 같이 공부했고 그것도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아내 초청에 필요한 재정보증을 선뜻 허락해 준 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사실 우리네 삶에 있어 타인에게 재정보증을 서준다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내가 숭실대학 재학 중에 큰형이 남의 재정보증을 섰다가 그 사람의 빚을 대신 갚는 바람에 우리 집안이 거의 망하다시피 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에 늘 자리해 있다.
그해 7월 말쯤, 가을학기 등록도 알아보고 교내직장도 알아볼 겸 학교에 갔다가 경비실에서 일하는 첫 학기의 룸메이트를 우연히 만났다. 그 당시 내가 있었던 기숙사에는 한방에 두 명씩 있었고 방과 방 중간에 샤워장과 화장실이 있었기에 4명이 함께 생활하는 거나 마찬 가지였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신입생 3명과 나를 포함해서 4명이 한 학기를 보냈다. 그들은 나이로 치면 자기들 삼촌쯤이나 되는 나를 여러 가지 형태로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그들은 학교 내에서 나를 위해 적당한 직장을 찾고 있었다. 경비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던 내 룸메이트는 경비실에서 지금 한 명을 채용하려고 광고를 냈기에 경비실장에게 이미 나를 추천해놓았다고 전해주었다. 그날은 첫 학기와 마찬가지로 3과목의 등록과 부부기숙사 입사신청을 마치고 또 경비직 인터뷰 날짜까지 잡아놓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아는 것이 힘이다
며칠 후 경비실 간부 몇 명과 인터뷰를 했는데 영어는 그만하면 되었는데 이곳이 위험한 지역이라 “자정부터 아침 8시까지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군대를 갔다 왔고 또 태권도를 잘해서 흉기만 쓰지 않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했더니 태권도 솜씨를 한번 보여 달라고 했다. 나는 시골서 공부하러 서울 온 지 얼마 안 된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기들한테 빵 안 사준다고 몇 대를 맞고 화가 나서 태권도 도장에서 몇 개월 동안 체형을 익혀서 기본 동작을 알고 있었다.
몇 가지 동작을 해보였더니, 모두가 웃고 박수를 치면서 자기들이 태권도 시범 때, 사범들이 한 것과 비슷한데 태권도를 몇 년 배웠으며 몇 단이냐는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조금 계면쩍지만 과장해서 대답했더니 즉석에서 채용되었다. 그때 로스앤젤레스의 육체노동자 세계에서는 한국의 태권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한국 사람이면 중국인의 쿵푸처럼 누구나 태권도를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무렵이었다. 인터뷰를 가기 전에 미국에서 몇 년 동안 고학한 한국학생들의 충고로는 인터뷰 중 적당한 기회를 보아 태권도를 잘한다고 하면 경비 취직은 쉽게 될 것이라는 사전 지식이 나에 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경비는 정규직이어서 월급과 건강보험 등의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등록금도 전액면제를 받았다. 사실 내가 경비로 취직되었을 때까지 미국대학에서 풀타임 교직원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대학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정보를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석사학위뿐만 아니라 박사학위도 마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보의 덕택으로 풀타임 교직원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세인트루이스 대학을 택해서 박사학위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때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교훈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불과 두 달 전에 초청했던 아내와 겨우 한 돌이 조금 지난 큰아이가 8월 15일에 미국에 도착해서 우리 세 식구는 내 공부가 끝났던 71년 1월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부부기숙사에서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동차도 없고 공부할 학비도 없는 처지에 가족을 미국에 초청한 용기는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