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만난 세 사...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의 부부기숙사에는 빈 아파트가 없었고 또 자동차도 없어서 버스로 통학할 수 있는 곳에 아파트를 얻었다. 개학 몇 주 전에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한 나는 학교를 매일 출근하다시피해서 교내직장을 구하는 한편 신문광고를 보고 교외직장도 함께 찾고 있는 딱한 형편이었다. 몇 주 동안 작성한 직업신청서와 페퍼다인 대학에서 공부할 때 경비실장이 써준 추천서를 남겨둔 곳이 수없이 많았지만, 인터뷰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있을 때, 대학은 새 학기 등록 을 시작하였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등록이 시작되어 3과목을 신청해놓기는 했지만, 이때쯤 미국의 사정을 알게 된 나는 이것으로 공부는 끝나는 것 같아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다.’는 우리 속담을 수없이 반복 하면서 하루하루를 불안감에 싸여 보내게 되었다.

청소부 아르바이트로 다행히 등록금 전액 면제

그러던 개학 직전의 어느 날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청소과에 빈자리가 있으니 와서 인터뷰하라는 연락이 왔다. 다소 긴장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인터뷰에 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취업이 되어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게 되었고, 보험 및 생활비에 큰 걱정 없이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서 뒤늦게 알았지만, 청소과 임원들 사이에서 아무리 외국학생이라 해도 박사학위과정에 있기에 청소부를 오래할 것 같지 않으니 채용하지 말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진 간부가 강력히 나를 추천해서 채용됐다는 것이다. 보수도 적고 고된 청소부들의 이직률이 높아서 청소부를 채용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오래 일할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둘 것은, 내가 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면 다른 한국인들이 득을 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나름대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 세인트루이스대학 정문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만난 미래 한국의 지도자들

1970년대 초반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미래 한국의 종교계와 학계 및 재계에 큰 영향을 남길 세 사람을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박홍 신부, 김기영 교수 허창수 회장이다.

뒷날에 서강대학교 총장직에 10년이나 재임한 박홍 신부와 대학 캠퍼스에서 자주 지나치며 눈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박홍 신부와 우리 가족은 같은 기숙사에서 일 년 동안 살았다. 그리고 내가 청소를 담당하던 건물에 있던 교목실에 자주 드나들던 박홍 신부와 자연스럽게 대면도 하게 되었다.

나는 박 신부의 덕택으로 이 건물에서 근무하던 교목실과 평화연구소의 직원들로부터 인간적인 대접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살던 부부기숙사 2층은 신부들 전용이었고 그곳에는 신부들의 출입이 허용된 생활필수품 창고가 있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청소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던 박 신부는 나를 이 창고에 몇 번 데리고 가서 원하는 물건을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도 했다.

풀타임으로 공부했고 또 풀타임 청소부로 일했던 이때가 나의 일생 중에 제일 정신없이 바빴고 또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나를 청소부가 아닌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대해준 그의 따뜻한 인간애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또 한 사람, 김기영은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시기에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내가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고학할 때 이 친구는 같은 도시의 워싱턴대학에서 장학금 수혜자로 수학하고 있었다.

박홍, 김기영, 허창수와 동문수학하며 교유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초기에 명성 있는 강의와 빛나는 연구업적으로 한국의 경영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고 나중에 연세대학교 부총장과 광운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학계의 재원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가시적 업적은 LG의 구자경 명예회장에게 100억 원의 기부를 받아 건립한 <상남경영원>일 것이다. 최신교육시설을 갖춘 상남경영원은 중견간부들의 단기경영교육을 위해 지금도 사용해오고 있다.

▲ 세인트 루이스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허창수 GS회장및 그 친지들과 (2007. 5.)

나와 허창수 회장의 순수한 인간적인 만남은 세인트루이스 대학에 유학생으로 만났던 197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농부의 아들로 청소부 고학생이었고, 허 회장은 대기업 총수의 아들로 자비 유학생이었다. 지나온 환경이나 앞으로의 진로가 밤과 낮처럼 상이하게 달랐지만, 우리의 변치 않는 우정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75년 8월, 나는 세인트루이스에서 1천 km쯤 떨어진 곳에 직장을 얻어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 새벽 이른 시간에 세인트루이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세인트루이스 대학에는 20여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지만, 내가 떠날 때 나를 전송해준 고마운 친구는 오직 지금의 허 회장뿐이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까지도 그때 웃으면서 손을 흔들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