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_1 (25화)

건망증은 기억을 잃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건망증이라는 말은 가끔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나 가벼운 기억상실을 일컬을 때 주로 사용하며, 심한 기억상실(기억장애)은 건망증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기억장애나 심한 기억상실은 뇌 손상이나, 질병, 약물 사용 등으로 생기며 알츠하이머병(치매)의 증상이기도 하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건망증이 조금 많아서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난처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의 건망증 에피소드 1

박사학위 과정은 대체로 과목이수, 종합필기시험, 논문 그리고 구두시험의 4단계로 이루어진다. 과목이수를 마치고 종합필기시험과 논문준비를 시작한 1974년 가을부터 재무관리과 조교로 채용되어 그동안 몸담았던 청소부 업무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대학 박사학위과정에서 조교를 하면 등록금은 전액 면제해주고 최소한도의 생활비까지 보조를 받는다.

논문을 제외한 그 지긋지긋 한 학업도 끝났고 또 장래직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육체노동도 끝났기에 미국에 온 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조교로서 나의 임무는 6명의 재무관리 교수들이 요구한 연구 자료의 수집, 분석, 시험감독, 채점 등이었다. 이러한 잡다한 업무들은 전부 나 의 장래 교수 생활과 연계성이 있는 일이었기에 흥미를 갖고 충실하게 하였다.

내가 조교가 되고 나서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키 크고, 잘 생기고, 마음씨 좋은 프렛 예이그라는 교수가 학회에 참석하는 동안 있을 시험을 대리 감독하는 일이었다. 이 임무를 받고 나서 내가 교수나 된 것처럼 솔직히 신바람도 났고 우쭐해서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청소부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대학생들의 시험감독과 시험지를 채점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한 일임이 틀림없었다.

경영대학은 내가 살던 부부아파트에서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시험이 그날 오전 10시에 시행되는 것을 오후 2시로 착각하고 지정된 강의실에 갔을 때는 다른 교수가 강의하고 있었다. 과장 비서와 학장 비서를 찾아가서야 내가 시험 감독을 오전 10시에 하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시험 감독할 사람이 제 시간에 안 나타나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다.

학회에서 돌아와 이 사실 을 알게 된 예이그 교수는 나를 심하게 꾸짖거나 비난하기보다 도리어 “네가 건망증이 있는 것을 보니까 교수는 너의 천직인 것 같다.”는 농담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이 실수 때문에 그 이후 지금까지 담당했던 수많은 대리 시험감독이나 내 과목 시험감독을 잊고 지나친 적 이 없다.

나의 건망증 에피소드 2

한미경제학회와 한국경제학회는 2년마다 서울에서 공동으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는 한국경제학회의 연례학술대회이기도 하고, 또 미국에서도 20~30여 명의 한미경제학회 회원들이 참석하기에 한미 양국의 경제교수들한테는 상당히 의미 있는 학술대회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 고급관리나 기업체의 대표들이 참석해서 한국의 경제 현실, 정부의 정책이나 기업 활동을 직접 설명 하는 관계로 뉴스미디어의 각광도 받는 편이다.

한미경제학회의 경우, 회장은 주로 예산의 확보를 위한 모금 등 자금관리를 도맡고 부회장은 미국이나 한국에서 개최되는 학술대회를 주관하게 되는 것이 그간의 관례이다.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던 1994년 나는 이 학회의 부회장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 학술대회에 발표할 한미경제학회 회원들의 논문수집, 심사 및 논문 선택 등을 해서 한국경제학회에 넘겼다. 이 학술대회의 합리적이고도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내가 참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였다.

나는 학술대회 하루 전에 서울에 도착할 항공권을 사두고 좌석의 배정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서울행 서북 항공기 탑승권을 요구했을 때야 내가 구입한 항공권은 이미 하루가 지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게 되었다. 항공사 직원들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하루 뒤에 서울에 갔지만 이미 이때는 2일간의 학술대회를 모두 끝낸 뒤였다. 이 학술대회에서 모든 것을 나에게 의존했던 변종수 회장(미 멤피스주립대 재무관리교수)은 내가 나타나지 않아서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고 했다.

회장인 변종수 교수와는 나이도 비슷하고 미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재무관리교수가 된 원로그룹에 속한 탓에 미국에서 나름대로 친분이 두텁고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미국에 돌아와서 변 교수에게 깊이 사과를 했지만, 그는 한동안 나의 전화를 받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상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