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제아무리 타인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하더라도 혈통관계인 부모와 형제자매만큼은 못하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혈육의 정은 깊다. 그래서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자녀를 가지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 남의 자녀를 키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과 살과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재미동포도 언제나 고국을 그리워하며 또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왜 그럴까?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재미동포들은 모두 단군의 자손으로 대륙의 심장과 겨레의 얼을 지닌 관계이기 때 문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설립된 재외동포재단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이법은 재외동포재단을 설립하여 재외동포들이 민족적 유대감을 유지 하면서 거주국에서 그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와 유사한 기관을 설립해서 자기 나라의 해외동포들 을 돕고 있는 것도 사실은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이다.
단군의 혈통을 가진 재외동포
나는 1969년 미국에 온 이후 지금까지 미국대학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공부했고 또 미국 대학에서 미국 학생들을 줄곧 가르쳐왔다. 그러나 교회는 한인교회에 나갔고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도 대부분 재미한인들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 재미한인들 외에 미국인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기는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미국에 몸담은 이후 한인들에게 크게 의존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인 교수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내가 공부하던 1970년대 전반만 하더라도 한인 교수들은 극히 드문 때였다. 그런데 내가 공부하던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경영대학에는 김승희(재무관리), 곽노균(경영과학)과 권익환(통계학) 이렇게 세 명의 한인 교수가 재임하고 있었다. 물론 이 세분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특히 김승희 교수와는 전공이 같기에 졸업 후에 책도 공동집필했고 또 내가 창간한 국제경영학 저널의 편집을 그만둘 때 많은 사람이 인수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김 교수에게 인계를 했다. 물론 나는 교회도 한인교회에 나갔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도 한국말로 했다. 그리고 내가 다니고 근무한 미국대학보다는 나같이 단군의 혈통을 받은 학생들을 위해 숭실대학과 연세대학교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동참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헨리 게디스 교수
내 일생 동안 나에게 제일 화끈한 도움을 준 사람은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헨리 게디스 교수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의 도움으로 생각지도 않던 조교가 되었고, 졸업도 예상보다 일찍 하게 되었으며, 이사할 때는 이사비까지 혜택을 받았다.
그와의 인연은 1972년 봄학기에 내가 그의 기업금융론을 수강하면서 시작되었다. 주로 기업금융론 시험이나 과제 등으로 몇 번 만나는 동안 나는 그가 한국 전쟁 중에 미군으로 참전했고, 한국 사람에 대해서 무척 좋은 인상 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만남과 접촉은 1974년 여름까지 잠복기에 들어갔다.
나는 청소부로서 남녀 공용기숙사와 교목실이 있는 건물을 담당 하고 있었다. 1974년 봄학기 어느 토요일에 경영대학 건물을 청소하게 되었다. 내가 2년 동안 청소부를 하면서 나의 담당 건물 외에 다른 건물을 청소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그날 무슨 일로 연구실에 우연히 들린 게디스 교수와 마주치게 되어 우리는 한 시간 정도 일상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청소부를 하면서 고학하는 것을 몰랐던 그는 “내가 가을부터 재무관리과 과장을 하는 데 너를 도와줄 길을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인연의 놀라운 도움
그의 놀라운 도움은 그 같은 우연히 건넨 몇 마디 인사가 있었던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덕택으로 그해 가을학기에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재무학과 조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가 과목을 이수한 뒤에 했던 재무관리 종합필기시험, 논문심사 및 구두시험에 특혜를 줘서 공부는 최소한 1년 먼저 마치게 되었다.
내가 미국에 왔던 1969년부터 1975년 6월까지 공부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리라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한국에 돌아갈 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사실은 한국에 직장을 구할 생각도 못 했고 또 한국에 정착할 자금은 고사하고 한국에 돌아가 차비도 없는 절박한 처지였다. 따라서 몇 년 동안 한국에 나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가을학기가 1~2개월 남은 입장에서 미국 내에서 직장을 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내 딱한 얘기를 전해들은 게디스 교수는 방학 중인데도 거의 매일 학교에 나와서 내 직장 구하는 일을 도와준 덕택으로 마침내 캔자스 주에 있는 포트헤이스 주립대학에 직장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나의 조교생활은 1975년 4월 말에 끝났기 때문에 이사를 하던 8월에는 수중에 돈이 거의 바닥이 났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는 내가 외출 중일 때, 내 아파트에 상당한 돈을 눈치채지 못하게 남겨두고 가서 이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배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