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에 미시간에 와서 자리가 잡혔던 1980년 말까지 그동안 포기하고 있었던 영구귀국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92년 봄학기에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에서 가르칠 기회를 마련한 것은 영구귀국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있었다.
한국에 한 학기 있는 동안 풀브라이트 한미교육위원단, 나의 동기동창과 선후배, 일가친척 및 그 외의 지인들로부터 난생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풀브라이트 장학금 받을 때부터 강의가 끝날 때까지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파행적으로 연속되어서 부득이 영구귀국은 영원히 포기하기로 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
풀브라이트 장학금 수혜자 선발과정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신청자가 제출한 제안, 추천서 및 이력서를 미국에서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의뢰한 사계의 전문가가 심사를 담당한다. 첫째 관문을 통과하면 신청자가 지정한 현지대학의 수락 여부를 현지 풀브라이트 교육재단에서 타진하게 되어 있다.
나는 첫 관문을 통과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 다시 말해 처음 두 번은 첫 관문을 통과하는데 실패하였다. 세 번째 풀브라이트 장학금 신청을 거의 포기하기로 했을 때 참을 인(忍)자 세 번이란 말이 나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리고 일단, 한 번 더 시도해보고 안 되면 영원히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예부터 참을 인자 셋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한다.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에는 어진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화가 나는 순간에 깊은 심호흡을 세 번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를 정도로 화가 가라앉고 마음은 평정을 얻게 된다. 이것은 생리적으로 순간적으로 촉진되었던 교감신경 자극 호르몬이 빠르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지속된다면 화를 내는 것이 내 인생과 맞바꿀 만큼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질이 급한 나는 나쁜 소식, 상대하기 힘든 사람, 실망스러운 일과 마주칠 때 과잉반응을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과잉반응을 일으키면 더 깊은 좌절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된다.
참을 인(忍)자 셋
상당히 오래전부터 나는 한문으로 참을 인자를 세 번 써서(忍忍忍) 나의 사무실 벽과 집의 공부방 벽에 붙여놓고 과잉반응을 자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문제가 심각하다고 예상하면 손으로 가슴을 툭툭 치면서 큰 소리로 “김석희 참아, 참아, 참아”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찾고 문제를 대하면 느긋하게 대응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사소한 일에도 마치 위급하고 대단한 문제가 일어난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삶 속에 마주치는 난관에 좀 더 쉽게 접근하는 습관을 터득하려면 웨인 다이어라는 작가가 말한 조화롭게 사는 두 가지 규칙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라. 둘째,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
나는 원래 1991년 말까지 나의 세 번째 제안의 수락 여부를 통고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미교육위원단에서는 1992년 1월에야 제일의 관문은 그나마 통과했지만 내가 지정한 서울대학에서 거절했다는 통고를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안 된 것으로 간주하고 1월 둘째 주부터 시작된 우리 학교의 강의를 시작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과는 결별했다.
김황조 교수와 관계중심인 한국사회
미국의 겨울 휴가는 2주밖에 없고 봄 학기 또는 제2학기 시작은 매년 1월 둘째 주부터 시작된다. 반대로 여름방학은 5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4개월간이고, 가을학기 또는 제1학기의 개강은 보통 8월 말이나 9월 둘째 주부터이다. 한국의 제도는 이러한 미국의 제도와 정반대인데 그 이유를 몇 번 생각해보고 또 다른 사람과 상의도 해보았지만, 속 시원한 해답은 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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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황조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명예교수 [출처: 연세대 동창회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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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세대학원 동기동창이고 또 그 당시 연세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있었던 김황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갑자기 나의 부탁을 받은 그는 연세대학에서 나를 초청하도록 설득하는데 몇 주일이 걸려 비로소 2월 중순쯤에야 결정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 당시 내 친구들과 은사 및 선후배들이 많은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을 현지 대학으로 신청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야 후회하게 되었다.
김황조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모교에 돌아와 경제학 교수로 근무하는 동안 상경대학부설 산업경영연구소 소장과 상경대학장을 역임했다. 노동경제가 전공인 이 친구는 대외적으로 한국노동경제학회 회장, 한국 노사관계학회 회장과 노사정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연세대학교 봄학기 개강 1주일 전쯤, 귀국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탈장이 발생했다. 집 근처의 병원 몇 군데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서둘러 수술을 요청했지만 예약한 수술환자들이 많아 최소한 몇 주간을 기다려야 수술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결국은 같은 교회의 교인이었던 조열하 장로(서울의대 출신)와 김시영 집사(세브란스의대 출신)가 서둘러 수술을 해준 덕택에 개강 이틀 전에 한국에 갈 수 있었다. 물론 두 한인의사도 빈 수술실이 없어서 나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병원이 문을 열기 전인 이른 새벽에 수술을 해주었다. 이처럼 한국은 관계중심의 사회인 까닭에, 단군의 혈통을 받은 후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인연의 소중함으로 한인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혼동
내가 강의를 담당했던 ‘국제금융론과 기업금융론 강의’는 한국말로 했다. 강의준비는 충분히 해도 수업시간에 한국말 학술용어가 빨리 생각이 안 나서 강의를 몇 초씩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한 시간의 강의 중에 몇 번씩 발생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심신이 불편한데 강의까지 매끈하지 못해서 나 자신은 드러내놓고 표현은 할 수 없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었다.
1969년부터 1992년까지 거의 25년 동안을 나는 연구와 강의를 영어로만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전공과목도 경제학에서 재무관리로 바꾸었다. 그동안 한국을 두세 번밖에 방문하지 못했고, 그것도 고작 며칠 정도만 한국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런 관계로 사실 나의 한국말 강의는 매끈할 수가 없었다.
상경대학 교수들은 영어로 하거나 한국말과 영어로 섞어가며 강의를 해도 좋다고 했지만, 그것도 생각한 만큼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국제교육의 상징인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에서 경쟁적으로 선택된 미국시민으로 가졌던 자부심과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영구귀국을 타진해 보려던 생각은 안타깝게도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도 못되어 포기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