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原電) 전(全)과정의 국산화_2 (123회)
  제15장 KNE 시절

1980년대 중반의 우리 경제, 산업계의 신화는 「국산화의 완성」이었다. 철강(鐵鋼), 조선(造船)이 완전 국산화 되었고, 자동차 또한 수출의 테이프를 끊음으로써 싼 값치고 품질은 괜찮다는 미주(美洲) 쪽에서의 반응이었고, YUGO 차들이 뉴욕에 상륙하자마자 「포니」와 「소나타」에 밀려나고 있던 시절이다. 

그리고 88년 올림픽을 향해 국가목표가 뚜렷하게 설정된 시기이기도 했다. 원자력계에서도 KNE 설립 이후 7~8년간의 각고의 노력으로 A/E의 국산화가 거의 달성되었는가 하면 Bechtel, AECL에 파견된 우리 기술자들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좋아 「Koreans No.1!」의 소리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원자로 계통도 설계 뿐아니라 제작도 국산화해야 한다는 당위의 소리가 화두가 되고 있었다. 이에 앞서 1984년 9월 동자부(動資部) 장관 주재로 원전사업 추진에 따른 핵심 역할 분담이 결정되었는데 ①종합설계(A/E)는 KOPEC ②원자로는 KAERI ③핵연료는 한국핵연료(株)가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런 원칙이 결정되었지마는 실행과정이 문제다. 다시 말해 사업주인 한국전력이 어떠한 구상으로 접근하는지가 관건이었다. 이때 원자력연구소의 한필순(韓弼淳) 소장, 임창생(林昌生) 박사 그리고 KOPEC의 정근모(鄭根模) 사장은 끈질기게 한전을 세뇌시켰고, 한필순 박사는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새로 부임한 박정기(朴正基) 한전 사장을 설득했다. 

원자력 국산화의 성공은 원자로의 자력건조에 있다는 것을 복음전파의 노력으로 성공시켰다. 다음 원전, 즉 영광 3, 4호기에서는 원자로와 계통설계를 외국공급자와 결판을 내는 방향으로 의기투합했다. 육사(陸士)와 공사(空士)의 합작품이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박정기~육사, 한필순~공사).

나에게 자문역으로서 첫 번째 부여된 임무는 86년 6월 한·가(韓·加) 및 한미(韓美) 원자력공동상설위원회 참석차 캐나다, 미국에 출장 온 전학제(全學濟) 과기처 장관 일행을 Boston에서 맞아 아리조나주 Palo Verde의 C-E 원자력발전소 단지에 안내 수행하는 일이었다. C-E 쪽에서는 Cahn 박사와 나였다. 6월 28일 C-E가 주선해 준 승용차로 현장에 먼저 가 있었다.

Palo Verde는 수도 Phoenix 서남쪽 쓴드라의 사막 오아시스에서 거대한 모습을 나타냈다. 미국 서부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지막한 관목 같은 식물로 덮여 있는 끝없는 구릉, 거기에는 100~200년에 걸쳐 자랐다고 하는 거대한 나무 전신주 같은 선인장이 군데군데 심심치 않게 서있는 모습이 참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강한 침을 가진 이 선인장은 한참 꽃을 피우고 있었다. 거대한 빨간색, 노란색의 꽃은 참말로 아름답다. 꿀도 많아 양봉(養蜂)의 오아시스라고 한다.

발전단지에는 3기의 원자로가 서 있는데 1호기는 일 년 전에 상업발전을 시작했고, 2호기는 시험가동 중이며 3호기는 마침 핵연료를 장전 중에 있어 골고루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물이 귀한 사막이라 거대한 세 개의 냉각수 탑이 있었고 Phoenix 시(市)에서 나오는 생활폐수를 재처리해서 이 사막까지 끌어와 냉각수로 이용하고 있다 한다. 

대 역사다. 60년대 미국 보수파의 거장 Mr. Goldwater 상원의원이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project였다. 1,000Mw 급인지라 600Mw 고리 원자로에 비교하니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원자로 격납고의 모양도 펑퍼둥실하게 약간 우리나라 백자(白磁)같이 생겨 훨씬 미학적으로 좋아보였다. 
 
▲ C-E 서울지사장 Peter Minan과의 담소

전(全) 장관 일행도 모두 이 C-E의 System-80에 호감을 가진 것 같았다. 전 장관은 내가 KIST에 잠깐 있을 때 화학분야에 계셨고 우리나라 화학계의 원로였다. 학자답게 말수가 없고 조용조용한 분으로 선비의 면모를 갖춘 분이다. 이런 분이 어떻게 장관직을 수락했는지 지금도 나는 의문이다.

전(全) 장관에게 일화가 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대덕연구단지를 시찰하고 상경하면서 환송 자리에 전 장관이 서 있었다. 전(全) 대통령이 “전 장관, 서울 가시지요? 같이 타고 갑시다.” 동승을 요구하자 엉겁결에 대통령 차에 올랐다고 한다. 대통령은 다른 장관을 태우면 여러 가지 소문도 무성할 것이고, 과기처 장관은 정치적 야심도 없을 터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동행하고, 자기가 잘 모르는 과학기술 분야의 「트렌드」도 들을 수 있고 일석이조를 노렸으리라.

그런데 고속도로에 달리는 두 시간 동안 전 장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과학기술계의 현안 등 많은 문제가 있을 터인데 전혀 언급이 없고, 묻는 말에만 조금씩 대답하는 정도였다. 이에 섭섭했던 대통령, 특히 담소를 남보다 즐기는 성격의 전(全) 대통령은 못내 섭섭했던지 상경하자 측근에게 “뭐 그런 사람이 있어!” 했단다. 전 장관으로서는 실수라도 할까봐 잔뜩 긴장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전 박사는 일 년을 못 채우고 장관직을 사임했다.

Palo Verde 원전 시찰을 한 일행은 퍽 만족한 표정이었으며 전 장관은 나에게 “김 사장, 수고했어요. 좋은 구경했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하고 현장을 떠났다.

나는 과기처 일행을 통해 영광 3, 4호기는 최대한의 기술이전을 통해 Palo Verde 같은 Copy Model로 건설했으면 하는 바램을 확인했다. 그리고 원자력연구소가 3, 4호기에 대한 기술평가 작업을 5개월에 걸쳐 진행하고 있으면서 장관 일행을 아리조나에 보낸 것은 C-E 기술에 대한 상당한 호감이 내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1985년 7월 한국전력으로부터 영광 3, 4호기에 대한 발주의향서를 받은 원자력연구소는 10월 31일 발전로(爐)계통 설계, 제작, 공급에 관한 후보대상 회사로서 미국 Westinghouse, Combustion Engineering사, 프랑스의 FRAMATOM 및 CANADA AECL의 4개사에 응찰서를 보냈고 1986년 3월 이들 4개사는 모두 입찰서를 보내왔다. 

제출된 응찰서에 대한 기술성 평가는 연구소가 6개월간 수행했다. 처음으로 국내의 관련 전문사가 합동으로 조직적으로 평가를 수행한 일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참말로 의욕적으로 애국심을 가지고 일을 수행했다. 이 기술성평가를 한국전력이 존중해 준 것이 연구소가 주체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고, 특히 T.T.(기술전수)의 별도 계약은 우리나라 발전로(爐) 계통 국산화에 획기적인 「모멘텀」이 되었다.

드디어 1986년 9월말 A/E는 미국의 Sargent Lundy(KOPEC의 Counter Part), 발전로 계통은 C-E(KAERI 그리고 한국중공업), 터빈발전기(T/G)는 General Electric사, 한국중공업으로 결정하고 초기 핵연료는 C-E(한국핵연료주식회사)가 공급하는 것으로 확정을 보게 된다. 국산화 Paper work(構想)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 것이다.

특이한 것은 내가 KNE 부사장이던 시절, 그렇게도 한국에 유치하려 노력했으나 일감이 많아 여력이 없다며 퇴짜를 놓은 S&L이 KOPEC의 하청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10여 년 동안에 세상이 많이 변했다.

C-E가 선택된 것은 특히 기술이전 계획(T.T.)이 특출했고, 가격도 C-E가 유리했다. C-E는 Three Mile Island 사고 이후 원전(原電)의 수주가 미국 내에서 바닥을 쳤고 재무구조상 많은 곤경을 겪고 있었다. 주식(株式)은 바닥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고 화력(火力) 분야만 유지를 하고 원전부를 매각하느냐 마느냐 절명의 위기에 있었다. 따라서 유지만이라도 해서 명을 부지하면 방법이 있겠지 하는 전략으로 나갔다. 그렇게 해서 가격 면에서 이익 부분을 빼고 원가 정도로 응찰했던 것이 주효한 것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원전(原電) 전(全)과정의 국산화_1 (122회)
  원전(原電) 전(全)과정의 국산화_3 (1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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