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님의 청년기 (143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백부님(字 園藝, 鉉周)

조선왕조 5백년의 종말을 고하고, 현대사의 여명을 재촉하는 1900년 백부님 鉉周(현주)는 진상면 지계(智溪)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지랑(旨郞)으로 이사해 성장하시고 조부님의 가산을 이어받아 가세를 성공적으로 키워나가는 수훈을 세웠다.

백부님은 어려서부터 조부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조부님은 백부님께 유기 밥그릇 뚜껑에 손잡이를 달아 깽매기(꽹과리)를 만들어 주셨고 고의춤에 애기를 넣고 다니다가 증조부에게서 야단을 맡기도 했다 한다.

백부님은 치밀하면서도 대담했다. 대단히 사교적이었으며 그 친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시골 벽촌 출신이었으나 언제나 당신보다 지체 있고 교양 있는 분과 친교를 추진했다. 한번 만나 말이 통하고 가치 있는 분으로 파악되면 평생의 지기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지방의 특산물인 김, 김부각, 죽순, 곶감, 꿀 등을 정성껏 수집해서 철마다 맨 먼저 우편으로 송달했고, 많은 감사편지를 받아 보관하고 계셨다. 우리집 가보라고 자랑도 하셨다. 인촌 선생의 답신 편지가 많은 것으로 기억한다.

백부님은 대단한 미식가이기도 했다. 가끔 직접 요리를 해서 큰어머니께 시범을 보이기도 하셨다. 한식은 물론이고 양식, 중화요리에도 해박했다. 술을 많이는 드시지 아니 하였으나 애주가였고, 매실주, 유자술, 두충주를 언제나 다락에 보관하고 손님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주안상이 준비될 수 있도록 했다.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일본식 생과자와 카스테라까지도 자주 주안상에 올랐다. 70여 년 전의 이야기다.

특히 옷, 입성에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다. 집에서는 주로 한복이었으나, 출입 시에는 반드시 양복 정장을 하고, 겨울에는 중절모, 여름에는 「파나마」 모자를 쓰셨다. 겨울철에 사업 차 서울에 올라가실 때에는 카라에 물개 모피가 붙은 두툼한 외투를 입으시곤 했다. 마치 무성영화에나 볼 수 있는 북쪽 어느 나라의 귀족처럼 말이다. 

청년기

여느 시골 도련님처럼 서당에서부터 그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당시 언문(諺文), 일본어, 산수 정도를 서당에서 배우고 15세 때 부모님을 처음 떠나 서울의 중동학원(中東學院)에 입학해서 약 2년 동안 신식교육을 받았다. 

당시 동갑내기요, 평생의 친구로서 가깝게 지내게 될 서운(棲雲) 황호일(黃鎬一) 선생(장래 나의 외숙부가 되실 분)과 동행했다. 서운 선생은 신학문에 별 취미가 없고, 그동안 시골에서 해 오셨던 한학(漢學 -주로 朱子學)이 바른 공부라고 판단, 중동학원 수학(修學) 2년 만에 귀향해 한학(漢學)에 전념하셨다.

중동학원 2년을 수료하신 백부님은 집에 돌아와 아버님(나의 조부님)을 도우며 소일하였다. 17세가 되던 해 이웃 동네인 옥곡(玉谷)면 금동(錦洞) 출신의 한 살 위인 정판순(鄭辦巡)과 결혼하였다. 두 분의 금슬은 유별나게 좋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의 사이는 극진했다.
 
▲ 백부님(字 園藝, 鉉周) [1945년경 촬영]

그런데 생모 차지방(車芝方) 할머니가 세상을 뜨시고 둘째 박본안(朴本安) 할머니가 가정의 주부가 되시면서 가내의 사정이 좀 복잡해졌다. 젊고 미모가 특출했던 둘째 할머니에 대한 조부님의 사랑이 특별했고 모든 가사의 주요한 일들이 박씨 할머니의 주장에 좌우되는 것 같아 백부님은 아마도 많은 소외감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초기에 재산을 일구느라 피땀 흘린 생모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가 하면 장가도 들었고 공부와 사회경험을 어느 정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조부님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권한과 자율을 허락하는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자 장자(長子)인 백부님은 ‘저항’을 선택하게 된다.

어느 날 돈을 좀 마련해 가지고 해외로 ‘오입’을 떠나버렸다.(서울지방에서 흔히 말하는 오입과는 뜻이 다르다. 우리 지역에서 ‘오입’이란 가정불화 등으로 타 지역으로 훌쩍 떠나 가출해 버리는 것, 생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통신을 단절하는 상태를 말한다.)

갑자기 집안의 장래 대들보가 사라져 버렸으니 난리가 났다. 전국에 알아볼 만한 데는 사람을 보내 각단지게 챙겨 봤으나 허사였다. 처음 있는 일이라 조부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러자 약 한 달 후에 일본에서 편지가 왔는데 여비가 떨어졌으니 송금을 급히 해 달라는 요청이 도래했다. 

조부님은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통곡을 하셨다. 관리인을 시켜 즉시 송금을 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간곡한 내용의 아버지의 뜻을 편지로 전했다. 송금 후 두 달 동안 또 소식이 없자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또 등기 속달이 도착했는데 만주 봉천(奉天-지금의 심양)에서 보낸 것이었다. 북경을 거쳐 귀국할 것이니 필요한 여비를 빨리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송금은 이루어졌고, 그 후에도 약 한 달간 또 소식이 단절되고 말았다.

고향에서는 모두 안절부절하고 있었는데 ‘지금 평양에 도착해 있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데 여비가 떨어졌으니 송금을 해 달라’는 내용의 전갈이 도착했다. 조부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관리인은 100원(당시 초등학교 교사의 월급이 25~30원 정도였음)을 송금했다. 

이 돈을 받은 백부님 객기가 동했던지 평양에서 서울(경성)로 평양~서울 간 유람 목적으로 처음 취항하는 일본 회사 비행기 6인승 단발기를 15원의 거금을 주고 탑승하여 여의도 비행장에 내리게 된다.

며칠 후 하동(河東)에서 인편에 소식이 왔는데 드디어 다음날 고향마을로 돌아온다는 전갈이었다. 갑자기 집에는 활기가 돌고 할아버지는 음식을 만들게 하고 흥분하셔서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 되셨다. 해가 뜨면서 수어촌 다리 쪽을 계속 망원경으로 보고 계시던 조부님은 정오쯤 해서 아들이 물을 건너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를 하셨다. 

그런데 10여분이면 사랑방에 도착해야 할 아들의 모습이 도통 보이지 않자 또 걱정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마당으로 들어오는데 웬걸 ‘싸릿대’를 한 묶음 짊어지고 들어오더니 마당에다 부려놓고 “이 불효자식을 쳐 죽여 주십시오.” 하며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할아버님이 이 광경을 보고 계시다가 하도 어이가 없으셨던지 자리를 피해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리셨다.

그날 밤 백부님의 그동안의 계획된 ‘시위’가 주효했든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사랑으로 불러 관리인 입회하에 모든 땅문서와 장부를 아들에게 넘겨주시고 사실상의 은퇴를 선언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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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부님의 부의 신장과 교육관_1 (1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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