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새 장가와 초등학교 (160회)
  제20장 나의 성장기

처녀 시절, 살을 에는 그 모진 삭풍속의 북간도 생활은 그 얼마나 어려웠을까? 부모 따라 오백 년 위터를 등지고 가신 망명길에 고생도 많았으리라. 과년해서 새신랑 맞으러 고향 땅을 오래간만에 밟고, 이후 아들딸 낳고, 살림솜씨도 익어갈 무렵, 병마는 우리 어머니를 요절을 냈다(병명은 결핵성 복막염이라 했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3학년 아홉 살, 한참 어머니의 사랑을 맛볼 때였다.

삼우제 날 외숙 서운(棲雲)님이 집에 오셨다. 외조모님의 충격을 보살피려고 내내 비촌에 계셨던 모양이다. 형제간 우애가 각별했던 우리 외가의 전통은 유명하다. “이 네 아이들을 위해서도 자네가 빨리 재혼을 해야 하네.” 서운(棲雲) 외숙이 우리 아버지에게 하는 당부였다. 다시 “재혼하면 내 동생처럼 챙기겠네.” 하시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다.

6개월 후 아버님은 처녀장가를 다시 드시고, 우리는 새 어머니를 맞이하게 되었다. 혼례가 끝나고 우리 집으로 신행을 하던 날 저녁, 가족끼리 모인 자리에서 서운(棲雲) 외숙은 우리 계모님 오정순(吳貞順)에게 대뜸 “이제 내 동생이니께 말 놓을 것이고, 동생으로 부르겠네.” 하셨다. 계모님이 이 세상을 뜨실 때까지 이 호칭은 이행되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인지 전처, 후처의 자식 모두 8명은 간극과 큰 갈등 없이 순탄하게 커 왔다.

어머님은 나의 버짐을 찍어 오염된 갱엿을 서슴없이 입에 넣고, “우리 새끼 애 먹이는 놈, 내가 먹어치워야 해!” 하시던 어머니, 평소에 그렇게 부드럽고 온유하던 그분, 이웃들에게도 마냥 어질던 우리 어머니가 그런 독한 데가 있었는가, 의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독립운동가 집안의 따님들은 그런 모진 데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계모님은 유순한 분이었다. 나의 소위 사춘기 시절에는 가끔 섭섭한 일이 있었다. 갈등이 생기면 내 생모가 아니니 저렇지 않겠나, 오해도 많이 했다. 그러나 서운(棲雲) 외숙의 말씀대로 ‘남의 자식 노릇하기도 힘들고, 남의 어미 노릇하기도 힘든 것이다.’, ‘운명으로 알고 참는 것이 가정평화를 이루는 길이요, 양반의 생활태도다.’ 하시는 말씀을 자주 새기면서 지내왔다.

가능하면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생을 개척하는 것이 대수라는 것을 일찍 스스로 터득했고, 가정의 도움은 존재했지만 나 혼자서 도전하고 개척하면서 인생을 살아나왔다. 그런 가운데 나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먼저 군대에 자진 입대했고, 무일푼으로 유학길에 오르기도 첫 번째였다. 후방에서 편히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자원해서 전방생활을 택했고, 장차 관직에 나가더라도 장교의 경력이 도움이 될 것 같아 보병학교에 주저 없이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나의 생활의 지평이 넓어졌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교우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많은 은혜를 입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격언에 「비극이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킨다」고 했다. 고통과 좌절 그리고 상실감 뒤에는 빛과 길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드는 비결이기도 했다.
 
▲ 외숙, 서운(棲雲)

일제 말기의 참상은 못 먹고 굶주린 부황증(浮黃症) 환자를 자주 보는 것이 일상으로 되어가는 암울한 시대였다. 우리말, 글을 못 쓰게 하더니, 성(姓)을 바꾸라 하고 곧이어 징병, 징용에다 정신대(艇身隊)라고 여자까지 끌어가더니 공출에 오곡은 물론이요, 유기그릇까지 쓸어가니 인간이 사는 세상이 못 되었다. 

마지막에는 여행허가가 없으면 기차도 못 타는 시대가 오더니 드디어 전기노선 버스까지 목탄차로 변했다가 아예 운행을 중지하고 말았다. 외부와의 통신은 걸어 다니는 장꾼의 입소문 그리고 우편국의 전화가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이런 험한 시대를 두 번 살았다. 또 하나는 6.25때였다. 

초등학교(國民學校)

진상소학교(津上小學校)로 전학 온 나는 2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 모양이다. 「심상소학교」라는 보통명사가 「국민학교」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할 전초전인지 국민총동원령이 기초가 된 것은 분명했다. 

‘무서운 시대’의 예고였다. 해방 그리고 건국 후 한참동안에도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계속 썼다. 일제 잔재를 없애자는 운동은 모든 정권에서 구두선(口頭禪)처럼 되풀이되었지만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수십 년 동안 없애지 아니했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1939년의 일본은 중국대륙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잠깐 살던 광주에서는 서주(徐州)를 함락했다고 행진을 하더니, 진상 시골에 돌아오니 소주(蘇州)를 점령했다고, 야밤에 등(燈)을 모두 하나씩 들고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합, 축하 궐기대회를 한다고 야단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지막 촛불 등 행렬은 남경(南京), 즉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절정에 달했다. 「등행렬」에 참가하는 학생과 일반인 모두는 등 하나씩을 들고 나타났다. 등(燈)은 대부분 각자 대나무로 엮어 만든 ‘틀’에다 한지를 풀로 바른 것으로 그 안에 춧불을 밝히면 그럴싸한 연등(煙燈)이 만들어졌다.

학교 교정에서 면장, 교장 등의 일장연설 후 일인 주재소 소장의 ‘천황 폐하만세’로 행사 집회를 끝내고, 시내 행진을 마친 다음, 각 동리로 분산된다. 전기도 없는 캄캄한 밤에 저 멀리 수십 개, 수백 개의 등불이 이동하는 것을 보면 유령의 장난처럼 섬뜩하기까지 했다.

일본 신도(神道) 숭배는 시골이 더 철저했다. 교문 우측에 천황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보관해 두는 봉안전(奉安殿)에 매일 아침 등교길에 절하고 하교길에 또 절하고, 그것뿐이 아니다. 교장선생님의 주재(主宰)로 조례(朝禮)를 하게 되면 동방예배(東方禮拜)라 해서 천황이 있는 동경쪽을 향해 90도의 배례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나팔수를 앞세우고 전교생이 도열해서 시내를 관통하여 신사당(神社堂)이라고 불리는, 일본 황실의 시조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을 모신다는 사당에 들러 재배(再拜)하고 돌아온다. 행사도 참 많았다.

어느 땐가 신사참배를 갔는데, 우리 동네인 지랑(旨郞)마을의 김(金) 장로님이 「기독교인 신사참배단」이라고 적은 깃발을 들고 신사 광장에 와 계셨다.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반대한다는데 이상하다 생각했다. 아들이 일본 육군 지원병 1기생으로 출정을 해서 협조할 수밖에 없구나, 생각했다. 

아들 김정도(金正道)는 몸도 크고 잘 생긴 청년이었다. 시골처녀들이 선망하는 신랑감 1호였는데 입대 후 딱 한번 고향에 와보고 중국전선에 파견되었다는 마지막 소식이 있은 후 영영 고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마도 전장 어디에서 실종되었거나 죽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교회를 대표하는 나의 급우 상엽(相燁)의 아버지인 안(安) 목사님이 신사참배단에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다. 들리기로는 광양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무슨 조사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안(安) 목사님은 여러 차례 서(署)에 불려 다니다가 1944년 아주 추운 겨울밤에 들이닥친 일경에 의해 연행되어 어디에 유치되어 있다가 해방 후 집에 돌아왔다.

나의 큰어머니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목사 가족을 은밀히 도왔다. 따라서 그쪽 소식은 비교적 잘 알고 계셨다. 일경이 목사님 집에 도착했을 때, 사모님이 먼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목사님을 연행하겠다는 말을 들은 사모는 경찰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하면서 ‘아이들 둘이 자고 있으니 아버지 연행 때 깨지 않도록 조용히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성경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서 불과 10분도 안되어 성경이 든 보따리 하나를 챙겨 들고 중절모자를 쓴 목사님이 나오시더니 묵묵히 따라가더란 것이다. 목사님 내외분이 얼마나 수양(修養)이 깊은 분들인가 짐작이 간다.

 
  어머님의 별세(別世) (159회)
  소학교 생활과 설날 (1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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