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정신대와 근로동원 (166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물자의 동원도 강화되어 갔지만 인적(人的)동원, 즉 인간의 공출도 본격화 됐다. 각 국민학교는 입대할 장정들이 기초훈련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 진사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훈련생’이라고 해서 30~40명이 집단적으로 제식훈련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목검, 목총으로 찌르기 훈련도 하고 있었다. 이들은 3개월 정도 훈련을 받으면 출정해서 입대하곤 했다.

그리고 나이 든 어른들은 징용(徵用)이라고 해서 징발되면, 보따리 하나씩을 옆구리에 꿰차고 마을을 떠났다. 북해도, 규우슈우(九州) 등지의 탄광에 가서 일을 한다고 했다. 군(郡)의 지시에 의해 할당되면 면(面)에서 뽑아 보내는 형식이었다. 하다못해 우체부라도 해야 징용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우리 우체국에는 임시직까지 합해서 집배원만 25명이 넘는 대호황을 누렸다.

이때 또 새로 시작된 것이 정신대원(挺身隊員) 차출이었다. 나이 어린 17~18세의 여자들은 일본 군수공장에 간다고 했다. 좀 나이 든 처자들, 시집갔다 못살고 돌아와 있는 여인들은 군부대에 예속되어 밥을 짓거나 군인들의 빨래를 해 주는 군속요원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지원하는 여자들도 있었지마는 대부분 강제동원 되었다. 그때 우리들은 군인들의 위안부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황군(皇軍)은 윤리의식과 도덕관이 철저해서 절대로 못된 짓을 아니 한다고 우리들은 배웠고, 그때 우리들은 군인을 어느 정도 신성시하기까지 했다.

일본 정부는 개인회사가 전선(戰線)의 상황을 고려해 사업목적으로 일부 정신대라고 모집해 갔으나 행정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그러나 내가 목격한 정신대는 확실히 관(官)이 개입했고, 면사무소와 군(郡)이 주축이 되어 모집해 갔다. 떠나는 동네에서는 곡소리가 요란했고, 정신대 차출로 인해 시골에서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확 퍼져나갔다.

15~6세가 되면 정혼을 했고, 어린 처녀가 남의 집 며느리로 떠나는 일은 흔한 광경이 되었다. 내가 5학년 때 같은 반이던 심재동(沈在童) 군은 겨울방학 때 장가를 들어 어른이 되었다. 조혼이 그때 상식이 되었다.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정신대 전력의 아주머니들은 시골 주막의 여인으로 또는 시골 한량들의 소실로 둔갑했다. 모두 몸을 버리고 온 이 여인들은 밑바닥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고을의 정신대 언니들은 타향으로 떠났고, 여수, 순천, 하동 등 타향의 여인들이 우리 고을에 유입되어 들어왔다. 

<1944년>

태평양전쟁은 그 종착역을 향해 숨 가쁘게 치닫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을 함락한 일군(日軍)은 그 여세를 몰아 「버마」에 상륙했고, 「인도」 국경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영국 식민지 인도를 해방해 친일국으로 끌어들이면 독립을 원했던 인도인의 열망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되어 수억의 인구가 항영(抗英)으로 돌아설 테니 정말로 유리한 전략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군(英軍)은 인도(印度)의 사병과 중국 장개석 군(軍)의 지원을 받아, 진군하는 일군(日軍)을 강력하게 받아쳤다. 모진 정글전에 지치고 보급의 한계를 경험한 일본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후퇴였다. 반수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잃고 말았다.

한편 「인도네시아」, 「뉴기니아」, 「가달카날」 등 여러 섬에서의 전투는 처절했고, 쫓겨 갔던 「맥아더」는 「호주」 북쪽에서 재정비하고 군비를 갖춘 다음 총반격에 나섰다. 일본군의 저항은 처절했고, 모두 옥쇄하면서 점령했던 섬들을 하나하나 미군에 내주면서 드디어 「필리핀」까지 쫓겨 오는 신세가 되었다. 중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원수로까지 진급한 야마시타(山下)는 포로가 되고 만다.

일본 본토는 말이 아니었다. 연일 B-29의 폭탄 세례를 받았고 군수공장이 많았던 「고베」 「나고야」 등은 초토화 되었다. 일본집은 목조가 많다는 것을 알고, 미(美) 공군은 「소이탄」 즉 「네이팜탄」을 투하해 도시를 불바다 잿더미로 만들었고, 시골로 모두 소개(疏開)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 B-29의 공습과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동경 시내 [출처 ; 버킷리스트 블로그]

일제가 한 가지 놀라운 정책을 쓴 것은 대학생 중 이공계(理工系)만은 끝까지 전선에 내보내지 않고 보존했다. 이들이 종전 후 일본 재건의 인재가 된 것은 역사에 기록할 만한 좋은 정책이었다.

우리 생활에도 모든 면에서 압박이 왔다. 우선 미곡의 공출은 전량 거두어 갔고, 하곡인 보리와 밀도 공출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훑어가다 보니 양식의 전량배급제가 실시됐다. 쌀은 거의 배급되지 않았고, 잡곡이라 해서 나오는 것이 만주에서 가져왔다는 콩기름 짜고 남은 콩깻묵과 약간의 옥수수가 전부였다. 이것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는 정도로 배급되었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풀떼죽에 쑥, 산나물, 해초, 호박 등 닥치는 대로 집어넣어 끓여 목숨을 부지하려 애썼다. 슬픔 중에서 배고픈 슬픔이 가장 모진 슬픔이라고 했다.

어느 날 앞집 이일준(李日俊)형 집에 계시는 90 넘은 할아버지가 험한 음식만 자시다보니 똥이 나오지 않아 손자인 일준(日俊) 형이 매번 똥을 젓가락으로 파준다는 말을 듣고 너무 불쌍했다. 우리는 좀 형편이 나아 보리밥이기는 했으나 밥은 먹었다. 그래서 형님과의 겸상이 작은 방으로 들어오자 잽싸게 밥그릇을 들고 앞집으로 뛰었다. 

그리고 일준 형 할아버지에게 전하고 나는 그 집의 풀떼죽을 한 그릇 얻어먹고 빈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것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아마 상을 가져간 정지꾼 아지매가 밥그릇이 없자 어머니에게 일렀고, 어머니는 죽도 얻어먹기 힘든 시국에 밥을 먹고 있다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지는 것이 좋지 않다 싶었는지 제동을 걸 생각이었든 모양이다. 아버지한테 혼쭐이 났고 매도 맞았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다. 근로동원이라는 노동Camp에 불과했다. 비가 오면 실내에 들어가 어쭙잖은 수업을 했다. 근로동원의 내용은 다양했다. 농사에 동원되는 것은 약과였고, 「송탄유」를 짜기 위해 관솔 가지를 구해오는 것이 가장 고단했다. 

학교 인근의 산은 민둥산이 된지 오래고 20리, 30리 길을 산에 들어가야 광솔 가지를 구할 수 있었다. 도구도 시원찮으니 연약한 소학교 학생 손에는 버거운 작업이었다. 

선생님 인솔 하에 매일 산으로 내몰려 관솔을 채취해 등에 지고 20리, 30리를 걸어 옥곡면과 진상면의 면계(面界) 근처에 있는 송탄유 뽑는 노천 공장으로 가져갔다. 거대한 가마에 차곡차곡 솔가지를 재고 밑에 불을 지피면 송진이 녹아 밖으로 흐른다. 이것을 받아 모아 드럼에 넣어 출하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터펜타인」, 즉 페인트 원료에 타서 쓰는 휘발성이 강한 액체가 되었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비행기를 띄우는 연료가 된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군수물자가 되었겠는가. 독려하고 독려했으며, 남북 전국이 송탄유 공장이 됐으니 얼마나 많은 기름이 생산되었겠는가. 그리고 우리 산하는 얼마나 많이 망가졌겠는가!

동원되는 일거리 중 또 하나는 싸리나무 껍질을 벗겨오는 작업이다. 이것은 비교적 쉬운 일감이다. 야산에 많은 싸리나무를 베어다 껍질을 벗기면 되는 것이다. 다만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산에 가서 작업을 하니 허기가 지고 돌아올 쯤에는 기진맥진했다. 

당국은 참말로 가혹하게 일을 시켰다. 이 싸리껍질은 「로프」로 만들어 군함에 공급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것도 군수품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동원작업은 산에 가서 머루, 다래넝쿨을 걷어오는 일이다. 이 재료들은 보통 안산에는 없고 최소한도 700~800m 고산지대의 오지에 가야 채취가 가능했다. 이것으로 즙을 내서 분말을 만드는 작업인데, 군인들이 진군하면서 개울물이나 오염된 물을 떠서 이 분말을 집어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고 했다. 전선의 군인에게 필수적인 휴대품이었다. 

일본은 이렇게 대동아전쟁 동안 R&D(Research & Development)를 통해 많은 기술을 축적하고, 이 기술은 해방 후 일본 산업재건에 밑거름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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