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가 불리한 일본의 징후 (167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어느 날 머루넝쿨을 채취하러 5, 6학년 남녀 합해서 140여 명이 비촌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날의 인솔 교사는 우리 넷째 숙부였다. 반일(反日)행위에 몰려 징역을 살판이었는데 큰아버지가 애를 써서 극적으로 석방시켜 낙향을 했다. 징용 때문에 교사직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날 인솔교사가 된 것이다. 

한참 작업을 하는데 5학년 학생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발등을 독사에게 물린 것이다. 이때 숙부님은 재빨리 때끼칼(주머니칼)을 꺼내어 물린 부위를 후벼 파더니 입을 대고 있는 힘을 다해 빨아서는 밖으로 뱉고 하기를 수십 번을 반복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독이 제거되었으나 일부 남은 독은 아이를 괴롭혔다. 

작업을 중단시키고 작업한 것만 짊어지고 모두 하산했다. 동네에 내려와 마차를 하나 구해서 면소재지 약국으로 내달았다. 다행히 응급처치가 주효해서 아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3개월을 병석에 누웠다. 

열심히 독을 빨았던 숙부님은 목에 독이 닿아서 2, 3일 결근을 하게 되었다. 후일담인데 김옥주(金沃周) 숙부님이 제헌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을 때 독사에 물렸던 학생의 아버지(梁三龍氏)는 아들을 살린 은인이라고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위급할 때 몸을 던지는 의인(義人)이요, 훌륭한 은사라고 선전함으로써 많은 표를 모은 것으로 안다.

1944년 연말부터는 일제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일본 근해에 있는 섬들(유황도, 오끼나와)이 하나둘 연합군에 점령되자 본토를 사수하겠다고 우리들에게 대창을 만들게 했다. 이것으로 적이 상륙하면 찔러 죽여야 한다고 일본인 교사와 교장이 우리들에게 수시로 세뇌교육을 시켰다. 심난한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나 부려먹는지 가혹할 정도였다. 일요일도 쉬지 않았다. 「日月火水木金金」이라는 새로운 노래가 생겨났다. 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공부는 짬짬이 했다.

이제 한반도에도 미군기(美軍機)가 종종 출몰했다. 바로 이웃 군(郡)인 남해 산꼭대기 금산(錦山)에 B-29가 추락해서 야단이었고, 부산 항만에 폭격을 당하는 일이 생겨 민심이 흉흉해 졌다. 그리고 「미나미」교장 후임으로 잠깐 와 있던 교장도 재향군인으로 재소집되어 학교를 떠났고 일본인 남자 선생님은 모두 출전해서 학교 선생은 공석이 많았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 여자선생님이 부임해 오고 그리고 어린 신출내기 조선인 선생님 두 분이 부임했는데 나이 많은 우리 급우 중에는 선생님과 동갑도 있었다. 전주(全州)사범 특수연수과 2년 졸업하고 급히 배치된 선생들이었다. 

거기다 6학년 우리 반(班)을 담임한 이석평(李錫平, 豊田 ~도요다) 선생은 키가 작고 앳되기까지 해서 선생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소년 같은 분이었다. 우리 반 고참이요, 장가까지 간 심(沈)군과는 가끔 티격태격했다. 어른 대접을 아니 한다는 불만이었다.

이석평 선생님은 여관도 문을 닫고, 식량 문제로 하숙할 곳이 없었다. 난감한 처지였다. 할 수 없이 우리 집에서 모시기로 했다. 모타리는 작고 위엄이 전혀 없는 선생님이었으나 안정되고 점잖았다.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었다. 이분과 같이 있게 된 나는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어, 산수를 매일 가르쳐 주었고, 중학진학을 위한 수험 준비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그동안 공부란 시험 때나 조금씩 했지, 학교 갔다 오면 책 보따리 팽개쳤다가 다음날 그대로 가지고 학교에 가는 일이 허다했다. 6학년 일 년 동안 나를 붙들고 지도해 주신 이(李) 선생님께 정말 감사한다. 6년 졸업 때 우등생 3명에 내가 끼게 되었고, 상급학교 진학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일제강점기 조선의 국민학생들이 산에서 근로동원을 하고 있다

이 무렵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광경은 학교 소사 형이 빵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고 교정에 들어서면 학생들이 우우 쫓아나가 밀어주는 놈, 뒤에 따라오며 벌렁벌렁 춤을 추는 놈 등 재미있는 광경이 전개된다. 공출로 식량을 몽땅 훑어가니 점심을 싸 오는 학생이 전무했다. 도시락을 싸 올 수 있는 학생은 있었지마는 못 가져오는 학생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아예 가지고 오기를 포기해 버리니 전원 점심을 굶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군(郡)에서 잡곡으로 빵을 만들어 국민학생에게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빵 배급을 하게 된 것이다. 소사의 고생도 대단했으리라 생각한다. 읍(邑)까지 40리길인데 높은 재가 두 개나 있는데다, 저 많은 빵을 싣고 재를 어떻게 넘었을까 궁금했다. 아마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시큼털털한, 단맛은 전혀 없으나 부드러운 먹을거리인지라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빵의 이름을 ‘결전(決戰)빵’이라 불렀다.

여기에 가미가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태평양전쟁 절정기에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은 역시 일본군의 「신풍(神風)특공대」이다. 서울대 주경철 교수가 쓴 글에 잘 요약되어 있다. 

‘...본토 쪽으로 쫓겨 오는 일본군은 어떻게 해서든 미국 항공모함이 일본 본토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일본 전투기는 양과 질에서 미군기의 적수가 못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 폭격기 한 대가 구름이 잔뜩 낀 날씨 덕분에 적에게 들키지 않고 다가가 자살 공격을 시도하여 항공모함 「프랭클린 호」를 파손시켰다. 이를 보고 오니시(大西) 중장이 생각해 낸 것이 가미카제 특공대였다.

44년 10월에 결성된 특공대는 첫 번째 자살특공공격에서 항공모함 「세인트 로 호」를 침몰시킴으로써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륙장치만 있고 착륙장치가 없는 이 특수 비행기들이 폭탄을 탑재한 후 날아가 목표물 40km 앞에서 분산한 다음 수직으로 내리꽂히듯 달려들었다. 

초기의 가미카제 공격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미군의 방비가 개선된 후에는 「가미카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모두 5,000번이나 감행된 특공은 미(美) 함정 35척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들은 가미카제 특공대는 일본 신(神)의 창조물로 알고 부러운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특공대를 찬양하는 「요카렝」노래를 입에 달고 다녔다.

<1945년>

일제는 제동시스템이 완전히 파열된 내리막길의 기관차 같았다. 일본의 할복(割腹, 셋부꾸)사상이 모든 전황을 이끌어가고 있는 듯했다. 끝까지 가다가 여의치 않으면 자결하겠다는 의지였다. 다음 또는 장래의 일본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일본의 전토가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관부연락선도 미(美) 잠수함의 공격으로 운항이 순탄치 않았다.

이제 6학년 졸업이 다가왔다. B-29 내습이라는 싸이렌 소리가 나면 지금까지는 학교 주변의 으슥한 곳에 숨고 했으나 이제는 아예 각 동(洞)별로 대열을 지어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나는 신시(新市)에 거주하는 학생들의 비상대피반장을 했다. 공습경보가 나면 신시의 학생은 전원을 소집, 동네까지 안전한 곳을 택해 유도하는 임무다. ‘엎드려, 일어서, 행진’ 등을 일본말로 진행해야 한다. 일본어 상용(常用)을 어기면 제재를 했기 때문이다. 가정에 돌아오면 조선말을 쓰지만 밖이나 학교에서는 무조건 일어를 써야 했다. 급우가 고발하거나 일본선생에게 적발되면 벌을 서거나, 청소에 강제동원 되기도 한다. 그때 철저하게 익힌 일본어는 지금도 서툴지 않다.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들려왔다. 특히 노약자와 임산부들이 많았다. 그리고 모두 영양이 부족한 터라 초봄이 되면, 홍역 등이 유행해 아이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신시에서도 부면장의 인솔 하에 2,3km 떨어진 산에 가서 송구(소나무의 부드러운 속껍질)를 해오기 일쑤였다. 이 송구를 벗겨다 물에 하루 정도 울궈 낸 다음 잡곡과 함께 찌거나 죽을 쒀 허기를 채우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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