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 (168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하루는 우리 집에 오래 살다 시집간 ‘명내미’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사연인즉 천수답 몇 마지기를 농사지으며 산골짜기 외딴 집에 사는 ‘명내미’는 벼 조금과 서숙 약간을 작은 독에 넣어 헛간 바닥에 묻었다 한다. 그런데 면(面)의 단속반이 거기까지 올라왔다. 대창으로 온 집을 찔러대더니 헛간의 것을 발견하고 자기남편을 흠씬 두들겨 패고 지금 주재소에 연행되어 왔다면서 징징 울어댔다. 

아버님이 마지못해 주재소에 가셔서 ‘명내미’ 남편을 데리고 돌아오셨다. 마침 주재소 일본인 부장은 없고 아버님과 친했던 박(朴, 木下~기노시다) 순사가 있어 이야기했더니 데리고 가라고 하더라면서 웃음을 지으셨다.

졸업을 앞두고 진학 문제가 대두되었다. 선택은 순천중학과, 외사촌 황하운(黃夏雲)과 나의 친형이 가있는 충남 예산농림, 두 곳이 있었다. 순천중은 동부 6개 군(郡)에서는 제일 명문이었고, 삼촌, 사촌형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소학교에서는 가정형편이 비교적 좋고 공부 잘 하는 학생이 1, 2명 정도 순천중으로 매년 진학했다. 그리고 아주 우수한 학생으로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경우에는 광주사범에 가는 경우가 있었다.

전황이 긴박해졌으므로 우리가 졸업하던 1945년에는 전국적으로 무시험 서류전형으로 선발했다. 시험 치르러 다닐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내신 성적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대단히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원서는 일단 순천중과 예산의 수의축산과에 넣었고, 권투선수로서 예산농림을 주름잡고 있던 5년 졸업반인 외사촌형 황하운(黃夏雲)에게도 연락을 해 놓았다.

얼마 있다 양 학교에서 모두 합격통지서가 왔다. 순천중에는 나를 합해 3명이 원서를 냈는데 나 혼자 입학이 허락된 것이다. 아마도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있었던 것이 나에게 안팎으로 유리했던 것 같다. 이제는 양교(兩校)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선 나는 어릴 적부터 동물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의사가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무엇인지 모르게 집을 벗어나고 싶은, 좀 역마살이 있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엄한 통제도 벗어나 자유로웠으면 했고, 어차피 계모 밑에서의 공허한 자의식은 타지로 떠나 있어도 마찬가지일 터이고, 그런데다가 권투 등으로 단련된 든든한 두 형님이 있어 충분한 보호도 받을 수 있고 해서 예산을 택했다(후일담이지만 순천중은 모처럼 진상국교에 어려운 한 자리를 배정했는데 수락을 거부했다고 하면서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함).

드디어 졸업식 날이 왔다. 예전처럼 운동장에 면민(面民) 대다수가 모이고 주요인사의 참석으로 거창하게 진행하던 졸업식이 아니었다. 교실 두 개를 튼 실내에서 조촐하게 이뤄졌다. 교장의 인사도 없었고(교장은 출병하였음), 박행래(朴幸來, 일본명 木下~기노시다) 선생의 진행으로 간단히 끝났다. 

졸업식의 노래 ‘호다루노 히카리’도 서양 이별의 노래라고 해서 금지곡이 되었고, 졸업사진도 물자가 귀한 나머지 찍지 못하고 말았다. 1920년에 개교한 이래 졸업사진이 없는 유일한 기(期)가 우리 21회 졸업생들이라고 한다.

진학하지 않은 일부 동기생들은 이런 파장 같은 분위기가 억울했던지 6개월 기다렸다가 광복 후 그해 9월에 복학해 한글도 배우고 일 년 후 사진도 찍고 졸업식을 제대로 했다고 한다. 나의 유일한 위안은 소학교 전 과정 가운데 6학년 졸업 때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우등상을 받았던 것이다. 

4월 초순으로 기억한다. 아버님이 앞장서시고 예산으로 출발했다. ‘릭색(배낭)’에 짐을 잔뜩 지고서 말이다. 목탄차로 겨우겨우 순천에 도착해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증명 관계인지 차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전주에 오니 역에서 「에기벤」이라는 도시락을 팔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 고을에서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데 여기서는 밥을 팔다니, 아마도 전주는 만경평야 등으로 곡식이 풍부한 지역으로 생각된다.
 
▲ 전주역 전경 / 1930년∥김해정 소장∥ 1929년 전주역이 현 전주시청 자리로 이전한 직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역 스탬프가 찍혀 있다. <출처; 전주역사박물관> 

천안에서 장항선으로 갈아탔다. 아버님과 함께 온양온천에서 일박한 것으로 기억난다. 일본인 온천여관인데 「오므라이스」 가 나와 또 한 번 놀랐다. 예산에 도착하니 하운(夏雲) 형과 진규(秦圭) 형이 마중을 나왔다. 처음에는 기숙사도 생각을 해 봤는데 식사가 아주 조잡하다는 이야기에 하숙을 하기로 했다. 하운(夏雲) 형은 졸업을 하고 보성전문에 합격해 서울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형과 나는 새 하숙집을 구해 들어갔다. 원래 치과의사였는데 의료 물자가 공급이 안 되니 의사를 포기하고 읍사무소에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는 댁이었다. 부인이 학생들을 5~6명을 하숙치며 가계를 유지하는 집이었다. 인테리 집이고, 배급도 받고, 오가면(吾可面) 큰댁에서 식량을 지원받고 있다하여 식단이 당시로서는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하숙학생 전원이 농림학교 선배들이었고 1학년은 나 하나였다. 일제의 긴박한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1945년 농림학교 졸업 때는 4년과 5년을 같이 졸업을 시켜 버리고 중등학교 5년제를 4년제로 강등을 시켰다. 따라서 큰형님 5년생은 학교에서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님은 우리를 정착시키고 고향으로 가셨다. 역에서 아버님이 떠나시는데 어떻게나 섭섭하고 슬프던지, 지금까지는 엄하시기만 했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런 애틋한 감정은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충남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답게 환경이 좋았다. 높지막한 곳에 교사(校舍)와 강당이 있고, 뒤편에 아담한 기숙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실습시험장으로 논밭이었고, 수의축산과는 동물사육장, 시험실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닭 부화장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일반 민수(民需)용도 공급한다고 했다. 

특히 멋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3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하는, 교문에서 교사까지의 진입로 양쪽의 프라타나스 가로수가 일품이었다.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입학식 날이다. 운동장에서 거행키로 했다. 그런데 그때 공습경보가 울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하얀 비행운을 뿜으며 반짝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그것이 B-29라고 했다. 이제는 유유히 우리 상공을 지나갔다. 입학식은 강당에서 간단하게 치러졌다. 

약 10여 일 동안은 일종의 「오리엔테이션」기간인 듯 했다. 축사에서 선배들이 말, 젖소(홀슈타인), 돼지, 염소 등을 다루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말뼈라고 하는 것들을 물에 세척하는 일도 거들었다. 제법 동물의사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뿌듯했다. 콩 타작도 우리들에게 시켰는데, 나의 전공과는 맞지 않아 이것은 아닌데 했다.

그리고 훈련도 빼놓을 수가 없다. 일주일에 두 시간씩 제식훈련, 목총훈련과 통신훈련을 시켰다. 일본 장교가 둘이 있었는데 대위인 배속장교는 포병출신으로 중국전선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일본 귀족 집안이라고 하는데 과연 점잖고, 못된 기합 같은 것은 주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털복숭이 준위였다. 중국전선뿐 아니라 만소(滿蘇)국경 흑룡강에서 말을 타고 소련군과 대치하느라고 아랫도리가 얼어 자식을 못 낳는다는, 철두철미한 제국군인으로, 원칙주의자였다. 잘못하면 용서가 없었다. 

어느 날 통신훈련 한다고 교사 주변 언덕에 둥그렇게 약 200m를 둘러 앉아 구두(口頭)전달 통신훈련을 시작했다. 처음은 ‘1중대 공격’ 이었다. 돌아온 전달도 ‘1중대 공격’으로 정확히 돌아왔다. 다음에는 ‘적군 내습’ 했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왜곡되어서 ‘적군 퇴각’이 되어 버렸다. 중간에서 누가 장난을 친 것이다. 운동장을 두 번 포복을 시키는데 혼이 났다. 훈련 중이라도 장난은 금물이라는 것이 교훈이었다.

이래저래 1개월 동안은 학교 주변에서 일을 시키거나 공부와 관련되는 실습을 시키더니 드디어 「근로동원」, 국민학교 때부터 귀에 익은 가혹한 노동의 대명사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2학년과 4학년은 대흥저수지에서 당진평야로 가는 수로 공사에 투입되고 1학년과 3학년은 오가(吾可)라고 하는 황무지에 가서 농로를 개간하는 작업이다. 새벽에 6~7km를 걸어 현장에 도착, 9시에 작업에 임해야 한다.

설익은 뼈대의 1학년에게 삽과 괭이를 들리는 것은 무리였다. 노동은 오후 서너 시까지 계속되고, 해산하면 철길을 따라 또 20여리를 걸어야 한다. 참말로 힘든 시기였다. 모처럼 비나 오면 일학년 전원을 강당에 집어넣고 어떤 전문과목도 아니요, 오직 국어(일본어)만 강의했다. 그것도 일본인 교사가 말이다. 

수의(獸醫)와 잠업(蠶業)은 조선인 교사였는데 1학기 내내 한번도 이분들에게서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 뻔뻔한 학교 운영에 치가 떨렸다. 이 교사(敎師)들은 매일매일 근로동원 현장에서 감독하고 귀가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내가 그때 수업료를 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에 없다. 다행히 1개월에 하루씩 일요일에 놀려주는 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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