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농림에서의 경험 (169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나의 반(班)에 박계순(朴啓順)이라는 기분 좋은 친구와 자주 대화를 했다. 이 친구야말로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봉창」 이야기, 상해에 우리 임시 정부가 존재하는데 김구(金九) 선생이 주석이라는 등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 소식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우리 고향에서도 어른들은 모두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광양의 일인(日人)들이 얼마나 억셌는지 주눅이 들어 전혀 그런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해 준 바가 없었다. 그동안 황국신민만 외치고 살아온 것이다.

또 이 동무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는데 중학에 어떻게 합격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국민학교 졸업 때 일등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말에 자기 집에 같이 가서 영양보충을 좀 하자고 초청을 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집은 수덕사 근처라 했다. 토요일 오후 막차로 홍성으로 갔다. 거기에서 30리를 걸어 들어가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밤중에 마을에 도착했다. 가족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5대(代)가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형님의 아들 등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77세라 했다. 마당에서 무릎 꿇고 인사를 드렸는데, 백발에 상투를 하신 모습이 신선 같았다. 또렷한 말로 “잘 오셨소. 이 오지 누추한 데를!” 하셨다. 그때 나의 생각은 인간은 이 나이까지 살 수 있구나, 했다. 그때 우리 호랑이 할아버지는 환갑을 갓 넘기고 계셨는데, 나는 할아버지가 참 오래도 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상 모르고 자다가 아침 훤할 때 깼다. 밥상이 준비됐는데, 개고기 무침에 보신탕까지 푸짐하게 나왔다. 세상에 충청도에 온 후 고기를 맛보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계순(啓順)에게는 형님이 있는데 서울 배재중 졸업반이라고 했고, 2년 전 결혼하여 돌짜리 아들이 있다고 했다. 

상냥하고 예쁜 형수님이 열심히 우리들을 대접했다. 그리고 건너 마당에서 한참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타작하는 방법이 우리 고향의 방식과 많이 달랐다. 우리들은 발동기로 타작기를 돌려 보리를 뽑는데, 거기서는 도리깨질 또는 절구를 눕혀 놓고 치는 원시적인 수작업 타작인 것에 놀랐다. 

그리고 박(朴) 군이 우리 역사와 해외 독립운동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구 한말에 사시던 조부님, 그리고 증조부님을 모시면서 수시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요, 사학(私學)에 다니는 형님도 정보를 가져와 집에 알리곤 했을 것이다. 박(朴) 군은 분명히 일제는 우리 국권을 유린한 침략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때 만큼 내가 왜소해진 적이 없었다.

박(朴) 군은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불교의 명소인 수덕사(修德寺)를 보고 가야한다고 하면서 앞장을 섰다. 높지막하고 전망이 좋은 곳에 대웅전이 있고, 뒷산은 수려했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차령산맥의 마지막 혈(穴)에 절이 지어져 있어 융성한 천년고찰이라고 했다. 조금 더 산중으로 끌고 올라가더니 꼭대기에 있는 암자로 안내했다. 

그리고 박(朴) 군이 설명하는데 계곡 저 밑에 처박힌 범종을 가리키면서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일제가 공출을 위해 암자에 있던 거대한 범종을 산 아래로 운반하던 도중에 인부들의 실수로 계곡으로 떨어져 인력으로는 도저히 끌어올릴 수가 없어 저렇게 방치해 놓고 있다 했다. 일본 감독, 운반 인부 등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는데 태업이라는 증거가 없어 방면되었으나 뒷이야기가 무성하다고 했다.
 
조선인 인부가 문화재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일부러 그 지점에서 재주를 부렸다는 이야기, 또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더니 운반하던 일단이 발을 헛디뎌 사고가 났는데 아마도 불심(佛心)의 작동결과라고 주변 마을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朴) 군을 위시해 그 애국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일제시대 수덕사 [출처 ; 블로그 danggan]

융숭한 대접을 받고, 부침개까지 싸들고 홍성역으로 긴 도보행군을 다시 시작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산의 생활은 나에게 많은 자양이 되었고, 내가 모르는 세상이 곳곳에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또한 인간애는 도처에 존재한다는 학습도 동시에 했다.

여기서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다. 황하운(黃夏雲) 형님은 체구도 거구였지만 미식가이고 먹는 것을 좋아했다. 예산에 있으면서 손(孫) 씨가 하는 중국음식점에 자주 진규(秦圭) 형님을 데리고 출입을 했다. 한참 커가는 체력에 음식의 공급이 필수이다. 

이래저래 단골이 되었고, 손(孫) 씨와 두 형님은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하운 형이 서울로 올라간 후 그 친숙한 관계는 진규 형님에게 전수되었다. 내가 갔을 때 형은 자주 나를 그 집에 데리고 갔다. 하숙집에서의 음식만 가지고는 항상 부족하니 보충이 필요했다. 

손(孫) 씨 중국아저씨는 참 심성이 고운 분이었고 인정이 많았다. 물자가 극도로 부족하니 좋은 요리를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성의껏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어 고기, 당면 등이 없으면 ‘양배추’, ‘양파’만 가지고도 대두유에다 드글드글 볶아서 양념 좀 해서 내 놓아도 그렇게 맛이 좋았다. 
 
그리고 가끔 우리 형제를 부엌으로 불러들여 어떻게 구했는지 ‘월병’을 구워 두었다가 우리들에게 내밀곤 했다. 그때는 먹는 것 이상 더 고마울 것이 없었을 때인데 참 신세 많이 졌다. 

곧이어 해방이 되고 손(孫)씨와 헤어졌다. 약 5년 후 뜻밖에도 인천 중국촌에서 그분을 만나 얼마나 반가웠든지, 이자정회(離者定會)가 된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근로동원, 그리고 배고픔은 8월 초 첫 방학에 들어가면서 끝이 났다. 처음에는 일요일도 뺏아 가는 이 자들이 방학이나 주겠는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한 달 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여행증명을 얻어 들자 형과 함께 냉큼 기차에 올라 고향길을 재촉했다. 그 해방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물론 일제 패망의 증후는 1945년 초부터 연이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미군의 대공습으로 인해 동경 시가지가 초토화 되었고, 유황도(硫黃島)의 옥쇄, 「오끼나와」의 처참한 최후 그리고 드디어 8월 6일의 히로시마(廣島)의 「우라늄」원자탄, 곧 이은 나가사끼(長埼)의 「플루노늄」 원자탄, 끝으로 마쓰오카(松岡) 외상(外相)의 위대한 외교적 성공으로 자랑하던 일.소(日蘇)불가침조약 파기 등, 일본에 불리한 일만 연속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평민들은 일제의 최면에 걸려 ‘어떤 계기가 오면 신풍(神風)이 작동하여 한방에 미.영군(美英軍)을 몰살시킬 것’이라는 ‘Myth’ 즉 신화를 믿도록 교육받아 왔다. 따라서 처음에는 일본의 항복, 또는 우리의 해방이 도대체 믿기지 않았다.

이때쯤은 우편국의 통신 직원은 대단히 바빴다. 우리 고을의 유일한 소식통이기 때문이다. 24시간 내내 하동, 광양 그리고 순천, 때에 따라서는 진주와도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면(面)에는 라디오 한 대가 없었다(큰댁의 라디오는 일제 말 밧테리 구하기가 힘들어 사용 중지된 지 오래다).

그리고 외부 소식을 나르는 버스도 근자에 올 스톱이다. 오로지 몇몇의 장꾼, 도보 여행자에 의해 부스러기 정보가 공급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편국의 전화 통신은 정확한 정보와 함께 신속하기까지 했다. 

대본영 발표 다음으로 우리 섬거우편국(蟾居郵便局)의 전화(電話)와 구전(口傳)은 주요한 정보쏘스였다. 당시 전화기의 성능, 그리고 밧데리의 과대사용으로 때에 따라 진주하고의 통신도 어려울 때가 있었다. 이때는 중간의 하동국(局)에서 중계를 해 준다. 따라서 남해 중부는 언제나 정보를 똑같이 공유하는 상태에서 연대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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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해방 (1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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