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170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모처럼의 방학에 푹 쉬고 있는데 8월 14일 오후 2시경, 우편국 통신직원 선형재(宣炯宰) 씨가 다가오더니 다음날 정오에 일본 천황의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를 접했다고 아버님께 보고하였다. 

나는 요사이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천황이 최후 독려를 하거나 미영(美英)에 뭐 하나 화끈하게 터뜨리는 정도로 생각했다.

다음 날 오후 1시쯤 되자 ‘중대발표가 있었는데 천황의 말이 일본 고어체(古語體)에다가 동경에서부터의 중계이기 때문에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하면서 전쟁이 끝이 난 것만은 사실인 거 같다는 정도’로 전달되었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이 난 모양인데, 어떤 형태로 끝이 났는지 몹시 궁금했다. 15일 밤, 명확한 회답이 왔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그 당당했던 큰 소리는 모두 거짓말이었구나, 생각하니 일본이 갑자기 발길에 채이는 썩돌 만큼이나 형편없이 보였다. 그 후 나의 인생에서 여러 번 목격한 독재, 전제의 말로가 이렇듯 허망하구나, 하는 것을 경험했다. 

① 종전(終戰)의 소고(小考)

미국의 원폭 투하 66주년을 맞이하여 세계역사학계와 언론들은 「과연 원폭 투하가 필요했던가?」, 「과잉 대응이고, 나날이 힘이 붙어가는 거웅(巨熊)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였다」는 등 많은 논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표적 수정주의 학자는 UC세인트바바라 대학의 냉전(冷戰) 연구의 대가 하세가와 교수라 하겠다.

그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등 ‘2류도시’ 두 곳이 핵무기로 공격당한 것은 일본의 전략적 결정을 바꿀 만한 것을 못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6개월간 60여 개의 본토 도시가 폭격으로 초토화 되었는데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고, 두 개 도시가 원폭으로 폭삭했다고 해서 일본이 서둘러 항복할 만한 꺼리가 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점에서 원폭 투하는 종전, 무조건항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복합적 요인 중에서 주요한 한 부분이었다, 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세가와 교수는 원폭의 위력은 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B-29에서 떨어뜨리는 재래식 폭탄인 1,000 Lbs와 2,000 Lbs는 논바닥에 떨어졌을 경우에도 직경 20m 정도의 구덩이가 패이고 살상범위는 고작 100m~200m로 보면 된다. 그리고 일본 도시의 주택, 건물의 구조상 폭탄보다는 불로 태워버리는 「소이탄」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다지 파괴력과 인명 살상이 대단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원자탄의 위력은 전혀 다르다. 한 구역이 아니라, 한 도시, 한 산하를 완전히 일시에 불바다,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 지하에 있어도 용암처럼 스며들어 인명을 요절낸다. 이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일본도 일제 때 경도제대의 물리학자를 중심으로 원자력에 관한 많은 연구를 진행해 왔다. 

다만 당시의 일본 국력으로 「하드웨어」까지 R&D를 추진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그 위력에 관해서는 일본 과학자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자탄 맞으면 끝장이다. 나가사키도 대부분 지방으로 소개를 갔으나, 남아 있던 8만여 명이 몽땅 희생되지 않았는가. 히로시마 시(市)도 도시가 비어있는 상태에서도 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재래식 폭탄과는 비교할 수 없다. 끝장이라는 것은 일본 대본영도 알았으리라.
 
둘째, 일제(日帝)도 본토와 조선반도에서 마지막 결전을 가상하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우선 우리가 잘 아는 한반도를 보자. 일군은 제주도에 지하 요새 등 어마어마한 시설을 하고 있었다. 여수 해변, 부산 수영(水營), 영도 등지에서 지금도 땅굴 요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서대전(西大田) 지역의 일본군 중앙사령부의 설치 등, 최후의 1인까지 항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폭발하는 히로시마 원폭

우리 국민학교에서도 최후의 항전이라고 해서 대나무창, 목총 등을 준비하고, 찌르기 연습도 심심찮게 했다. 총동원인 것이다.

전장에서 귀환한 학병과 징병 선배들과 많은 대화를 해본 적이 있다. 일본 본토사수 전략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은, 본토에서 끝까지 해 보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고, 하나같이 증언했다. 항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태평양에서 패배하자 살아남은 병력과 새로 징병한 인력을 일본 본토, 특히 규슈(九州), 시고쿠(四國) 그리고 마지막 보루인 후지산 고텐바(御天場) 시(市) 근처에 총집결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미국도 본토 상륙을 통한 일본 평정에 연합군 최소한 사상자가 200만(萬) 정도는 날 것으로 예측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탄 투하라는 인류 처음의 대재앙이 강행된 것이 아닌가, 본다.

히로시마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핵심 인물과 군국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군수기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원자탄이 됐던 소련의 전격적인 공격 남하가 됐던 일본이 항복했으면 그만이지 무슨 대수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정리해 가는데 많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계속 논쟁이 이어갈 것으로 본다. 특히 미국은 명분이 약한 원폭 투하로 몰리면 미국의 「Integrity」, 그리고 국가의 도덕, 윤리성에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의 글이 이에 관하여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끝으로 여기에 적어볼까 한다.

‘...원폭 투하가 종전을 앞당겼다는 통념은 큰 그림에서 옳다고 할 수 있지만 「트루만」의 결정에는 소련 견제 의도가 있었다는 수정주의 이론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 우리로서는 원폭 투하 이후 소련이 참전의사를 굳히게 됐고, 이것이 남북분할 점령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관심 가질 만한 논쟁...’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② 일본천황 히로히토(裕仁)

지금도 학계에서는 일왕(日王)은 비겁한 전범자다라고 주장하는 쪽과 ‘연약한 일왕(日王)은 강한 군부에 떠밀려 할 수 없이 수동적으로 협조했다.’는 두 갈래로 나눠져 있다. 나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학도로서 그리고 일제시대를 체험한 사람으로 항상 이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왔다. 나의 체험과 연구에서 얻은 바를 여기에 적어 보고자 한다.

하버드大에서의 학위 후, 30여 년간 일본사를 전공하고 일본 히도쓰바시大 교수를 거쳐 지금 미국 빙햄튼大에서 가르치고 있는 「허버트 빅스」 박사는 최근 저서에서 「裕仁」의 책임론을 강력하게 따지고 있다. 그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전쟁 확대과정에서 「히로히도」는 전쟁에 동의하고 사후재가(事後裁可) 하거나 주요 국면에서 적극적이고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남만철도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통해 만주침략을 본격화했다. 이때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 繁)는 단독으로 공격명령을 내렸고, 조선군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 銑十郞)는 대원수 「히로히토」의 재가(裁可) 없이 조선 주둔군의 일부를 국경을 넘어 만주에 원군으로 파병했다. 

이에 궁내성(宮內省)가나야 한조(金谷 範三)는 즉시 히로히도에게 현지 사령관이 재량권을 발휘해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대원수 통수권을 침범한 일에 대해 히로히토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은 앞으로 주의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승전보에 고무된 일황(日皇)은 ‘혹시 필요하다면 나는 사건이 확대되는데 동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후 관동군을 찬양하는 칙어(勅語)를 내렸고 군인, 관리 3,000여 명에게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훈장」을 주어 사기를 드높였다.
 
그리고 1936년 중일전쟁 때에는 「히로히토」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동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히로히토」는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사후재가 하면서 「중국군을 응징하고, 주요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임하라」는 칙령도 기록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일제의 가장 비인도적인 처사였던 1937년 7월 28일 화학무기 사용 허가도 일왕이 내렸다. 그런가 하면 독가스 사용을 375회에 걸쳐 허가했는데 모두 대원수가 주관하는 대본영의 공식재가가 나 있었다.

또한 「하와이 진주만」 공격도 히로히토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부전파(不戰派)인 고노에(近衛) 수상을 전격 해임하고 대미(對美) 강경파였던 도조 히데기(東條 英機) 대장을 개전 직전 1941년 10월 전격 임명했다. 개전을 반대했던 고노에 수상은 훗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내가 총리대신으로 폐하께 개전의 불리함을 말씀드리자 그것에 찬성하셨다가, 다음날 어전에 나가자 약간 전쟁 쪽으로 기울어지셨다. 그 다음에는 더욱 전쟁 쪽으로 기울어지셨다. 유일한 버팀목이신 폐하가 이렇게 나오시니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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