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진주(進駐)와 복학 (174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개학이 된다는 연락이 왔다. 형과 나는 바랑을 하나씩 준비해 짊어지고 예산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려고 순천역에 가보니 인산인해였다. 그때까지도 일본인들의 철수행렬이 만만치 않았다. 셋째 숙부님 희주(禧周, 순천 철도국 촉성위원장)의 도움으로 객차에 오를 수 있었다.

기차가 가다서다 하는데 장항선이 시작되는 천안까지 만 하루가 걸렸다. 장항선은 사철(私鐵)이어서 그런지 무질서의 극치였다. 기차 곱배의 지붕까지 사람이 올라타는 데는 아연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되고 2개월이 채 못 되었는데 사회질서가 어떻게 이렇게 삽시간에 무너질 수 있는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숙집에 찾아갔더니 거기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숙 주인이 징용을 피하기 위해 일시 읍사무소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징용 담당이었던 모양으로 고향으로 귀환한 징용자들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매일 밤 문밖에 와 행패를 부리고 못살게 굴었다. 

주인은 할 수 없이 집을 떠나 어디론가 피신을 했다. 이들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들 하숙생 5~6명의 몫이었다. 여주인은 교양이 있고 좋은 분이었다. 항상 애기를 업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우리들은 일체가 되어서 아주머니를 잘 보호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일본 교사들은 모두 철수하고 한국교사라고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일제(日帝)에 좀 기울었던 선생님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럴 즈음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님이 진주 우편국장으로 부임했고, 전학서류를 챙겨서 진주로 속히 내려오라는 전갈이었다. 잘 됐다 싶어 속히 정리를 하고 또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천안에서 경부선을 갈아타는데 이것은 완전히 아비규환이었다. 젊음이 우리를 지탱했다 할까, 열차 지붕위로 기어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기차는 떠나 달리는데 터널을 통과할 때는 곧 머리를 치는 것 같았다. 형과 나는 부둥켜안고 납작 엎드려 이 위기를 모면하면서 굴 통과에 점점 이력을 쌓아갔다. 

이제 자신이 생기고, 대담해진 나는 굴을 통과할 때 살며시 손을 치켜들고 굴 천정에 손이 닿는지 시험을 해 봤다. 닿지 않았다. 엎드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열차 위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타고 달린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그러나 대개 사고가 나는 것은 꼭대기에서 졸다가 떨어져 참변을 당한다.

삼랑진에서 내려 마산, 진주행에 갈아타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진주우편국은 경남 서부 6개 부(府), 군(郡)의 우편국을 감독하는 주무국으로서 규모도 컸다. 그리고 일제 때 고등관 우편국장이 거주했던 관사(官舍)답게 그 규모나 위치가 대단히 좋았다. 

촉석루 위쪽 남산공원에 위치한 이 관사는 남강이 구비쳐 흐르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진주사범, 진주중학, 진주농림 등 경남에서 일류로 꼽히는 명문들이 즐비하고, 도시도 깨끗한 곳이었다. 음식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물산도 풍부한 이곳은 정말 계속 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데 조용했던 이 도시도 서서히 이념의 싸움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청(府廳, 지금의 시청) 앞에 쌀배급을 달라는 데모가 시작되더니 남강교(橋) 바로 입구 쪽에 있는 「대동기계」의 근로자들이 파업을 하고 붉은 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 

군정(軍政)을 담당했던 미군들이 무장을 하고 부청(府廳)을 지키기 시작했다. 도시가 갑자기 살벌해진 것이다. 이때부터 공산당의 대중선동과 조직적 활동이 본격화되어 갔다. 어느 우익조직 보다도 앞서서 말이다.
 
▲ 해방과 함께 서울에 진주하는 미군

우리 어머니는 진주생활이 별로였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풍부했으나 아버님이 진주기관장 회식 모임에 자주 출석하는 바람에 귀가가 늦었고, 일요일도 외출을 하는 일이 자주 있어 이 도시에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때 아버님이 부산 지방체신청의 총무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우리 어머니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부산 체신청은 당시 경남, 경북, 전남, 전북 그리고 제주도 등 5개 도(道)의 우편국, 전화국, 건설국을 관장하는 감독기관으로 관할이 아주 넓었다. 

인사권을 행사하는 총무과장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37세의 약관으로서 아버님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 미(美) 고문(顧問)과의 협의는 아버님 몫이었고, 따라서 아버님의 화려한 관료생활은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⑥ 경남중학교(慶南中學校)

한학(漢學)의 대가 안용백(安龍伯) 교장이 이끄는 경남중학은 해방의 충격에도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었다. 많은 일본학교의 폐쇄로 선생들이 경중(慶中)으로 옮겨 왔고, 일본에서 귀환한 유능한 교사가 속속 도착해서 교수 진영도 쟁쟁했다. 학생들의 배경도 다양했다. 일본인 학교였던 1중(中), 1상(商), 1공(工)에 다니던 일본 학생이 귀환하는 바람에 남게 된 한인 학생들이 2중(中)이었던 경중(慶中)으로 옮겨왔다. 

전학 온 이들은 샘플 케이스로 일인(日人) 학교에 몇몇씩 입학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우수했다. 그리고 머리는 우수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주사범에 갔던 부산 근방 출신 학생들은 일정(日政) 때의 사범학교 특혜가 없어지자 대거 경중(慶中)으로 전입해 왔는데 이 학생들의 질이 매우 우수했다.

이들과의 경쟁은 나로 하여금 분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우수한 학생을 가진 학교가 변변한 교사(校舍)가 하나 없었다. 일제 말엽 교사 신축을 하다가 전황이 어려워지자 중단하고 말았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소학교였던 대청동 「남일국민학교」를 일시 빌려 쓰고 있었다. 이때에 나는 경중(慶中)으로 전입학한 것이다. 교사도 비교적 새 것이고 도심에 있기 때문에 통학도 편리한 장소였다. 그러나 소학생 전용으로 건축한 학교이다 보니 운동장이 협소해 6년제 중학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드디어 이사하는 날이 왔다. 도청에 가까운 곳 토성동에 과거 일본인 여학교로 쓰던 까만 목조건물이 우리들의 새 보금자리가 되었다. 건물은 보잘 것 없었으나 후정에 커다란 운동장이 있어 야구, 축구 등 마음대로 하며 놀 수 있었다.

이사에는 우리들 꼬마 1년생들도 자기 책상, 걸상을 직접 지고 날라야 했다. 두 번 왕복을 한 셈이다. 5학년, 6학년 형들은 어른들이었다. 일부는 일본 군대에서 귀환해 왔는지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다니고 있었다. 여학교 화장실을 남자용 화장실로 급조했던지 소변보는 데는 개별 칸막이가 없어 옆 사람의 물건을 모두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소변을 보고 있는데 「하마」 같은 큼직한 덩치의 선배 한 사람이 쉬를 하러 내 옆에 섰다. 옆으로 힐긋 보니 만만치 않은 것을 턱 꺼내어 거침없이 쏟아 내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6학년생 축구부장인 김택수(金澤壽) 형이었다.

새로 입주한 우리 집은 서대신동 2가 166번지 체신부 관사였다. 진주우체국장 관사만은 못했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역시 일제 고등관 사택이었던 만큼 널찍하고 쾌적했다. 학교까지는 20분 정도의 거리여서 도보행진에 안성맞춤이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덜컹거리는 전차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친일 논담(親日 論談)_2 (173회)
  경남중학교(慶南中學校) 전학 (17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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