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大韓民國) 호(號)의 출범_1 (181회)
  제22장 나의 청소년기와 해방공간

출범(出帆)

태산준령을 넘고, 모진 폭풍, 설한을 견디며 대한민국은 드디어 탄생했다. 1948년 8월 15일 11시 20분, 중앙청 광장에서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렸다. 중앙 단상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해 UN감시위원단,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 등이 자리 잡았다. 

이승만 박사는 48년 5월 31일 첫 제헌국회의장에 당선되어 정부 수립 직전인 7월 24일까지 의장직을 수행했다. 48년 5.10총선을 통해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으로부터 188표를 얻어 초대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서울 종로에서 당선된 같은 제헌의원으로서 95%에 가까운 지지율로 의장에 당선된 것은 당시 ‘유일한 대통령 후보’라 불릴 만큼 정치적 위상이 높았다 하겠다.

이(李) 박사는 약 2개월간의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 국호를 정하고, 헌법 제정을 주도했다. 당시 국내에서 “대한민국” 외에 “한국”, “조선민주공화국”, “고려공화국” 등 다양한 국호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법, 행정, 사법의 3권분립(三權分立)은 이의가 없었으나 내각제(內閣制)냐, 대통령중심제(大統領中心制)로 하느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할 경우, 당파 싸움으로 정정(政情)이 극히 불안해질 수 있다’ 며 건국 초기의 국가안전과 국가자원의 효율적 동원을 위해 대통령 중심제가 합당하다는 이(李) 박사의 주장이 내각제를 밀쳐냈다.

8월 15일 11:20분 3 .1운동 33인 중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신생 정부 대한민국을 갖게 된 감격, 비할 바가 없다’ 는 인사말과 함께 기념식의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대통령의 취임 인사는 ‘인권과 자유’, ‘자유와 책임’, ‘통상과 공업진흥’, ‘근로자와 기업의 공존’, ‘통일방략’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편 취임식 전 8월 3일 이범석(李範奭) 씨가 초대 총리로 임명되고 이틀 뒤인 5일에 전(全) 내각이 발표되었다. 당초 총리에는 이북을 대표한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의 이윤영(李允榮) 씨가 지명됐으나 한민당(韓民黨)과 국민회의(國民會議)측에서 반대함으로써 민족청년단의 이범석 씨로 2차 지명이 되었다.

내각을 살펴보면 외무~장택상(張澤相), 내무~윤치영(尹致暎), 재무~김도연(金度演), 국방~이범석(李範奭) 겸임, 법무~이인(李仁), 농림~조봉암(曺奉岩), 사회~전진한(錢鎭漢), 상공~임영신(任永信), 문교~안호상(安浩相), 교통~민희식(閔熙植), 체신~ 윤석구(尹錫龜), 무임소~이윤영(李允榮), 이청천(李靑天) 이었다.

유능하고 비판적인 인사들이 배제되고 순종적인 인물들만 기용했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각 정파 간 분배를 통해 무난하게 꾸린 연립내각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었다.

이 내각 구성 중에 두 인사가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첫째, 공산주의자, 코민테른 출신의 인천의 조봉암(曺奉岩) 선생이 농림(農林)에 발탁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는 과묵하고, 식견도 높으며, 카리스마가 있는 사회주의자였다.

나는 대학 시절 몇 차례 강연도 들어보고 몇몇 동료와 함께 사석(私席)에서 면담도 해 봤는데 매우 스케일이 있는 분이었다. 이(李) 박사 이후의 정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역량의 거물로 봤으나 너무 일찍 노출되었고, 이(李) 박사와 대결하는 국면으로까지 치닫자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사형 당하기 며칠 전, 면회 간 측근에게 “두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골짜구니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 하며 체념을 하고 세상을 떴다.
 
▲ '의외 인물'이 발탁될 것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인터뷰로 초대 이범석 총리 기용이 가시화 되었다  (동아일보 1948. 7.24.)

또 하나의 인사는 상공부 장관에 발탁된 임영신(任永信) 선생이다. 임(任) 장관은 많은 일화를 남긴 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장관이자 지역구 여성국회의원의 타이틀을 가졌다.

당시 전북 금산에서 12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나 전주 기전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USC를 졸업하고, 1931년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의 전신) 교장에 취임, 여성교육자로서 자리 잡았다. 

미국에 있을 때 대공황으로 직장 잡기가 어렵자, 운전면허를 따서 중고 트럭을 하나 구입해 하루 12시간을 뛰어 돈을 벌었다. 수입 중 자기 끼니를 때우기 위한 최소한의 돈만 쓰고, 몽땅 이(李) 박사에게 정치 구호자금으로 바친 일은 유명하다. 가장 이(李) 박사에게 충성했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질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李) 박사가 귀국하자 그를 정치적으로 돕기 위해 1945년 최초의 여성 정당 「대한여자국민당(大韓女子國民黨)」을 설립하여 당수가 되었고,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세계 역사상 처음의 여성정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60년 전의 일이다.

임(任) 선생이 상공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남긴 일화도 대단히 다양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내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싸웠고,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못지않게 뛰어다녔다. 그런 나에게 결재 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당장 보따리를 싸라.” 

이 한 마디에 상공부 직원들이 오금을 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오줌론(論)을 남성보다 더 남성 같은 그녀의 장쾌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멋진 한 방이라고 평(評)한 바 있다.
 
외군철수(外軍撤收)

미국이 유엔 감시하의 선거 실시를 서두른 이유의 하나는 1947년 9월 소련이 주장한 「한반도에서의 양군(兩軍) 철수안(撤收案)」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가 무섭게 9월 15일부터 유엔이 한국문제를 최종심의 하기도 전에 본격적으로 철군을 시작했다. 따라서 49년 6월 말에는 7,500명 여단병력만 남기고 철수를 완료했다.

소련군은 1948년 하반기에 북한으로부터 철수완료 했다고 주장했는데, 문제는 철수하던 소련은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무기, T-34 중무장 탱크 150여 대를 포함해 많은 무기를 북한에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그리고 20만 인민군을 무장과 함께 철저한 전투훈련까지 완료하고 철수하게 된다. 미국과 소련은 같은 철수를 했지만 철수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하겠다.

이와 같이 소련의 동북아 공산화 대전략은 이미 구체화되고 있었다. 즉 미국과의 태평양 대결 구도를 완성하기 위해서, 소련에게 조선반도(朝鮮半島)가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전했던 조선의용군이 속속 귀환하면서 북한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되었고, 1950년으로 접어들면서 힘의 균형이 완전히 북(北)으로 기울어져 갔다. 당시 육군정보국의 판단에 의하면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1분당 발사 탄수(彈數)에서 남한은 북한의 1/10에 불과한 절대 열세(劣勢)였다. 좋은 무기를 가지면 쓰고 싶은 것이 그 속성이다.

이제 역사상 미증유(未曾有)의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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