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_1 (182회)
  제22장 나의 청소년기와 해방공간

국회 프락치 사건

1949년 이른 봄 어느 날 새벽,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우리 가족 모두는 선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했다. 장소는 서울 북아현동 1번지 체신부 총무과장 관사, 우리 집이었다.

형님 진규(秦圭)가 황급히 쫓아나가 “누구세요?” 하니, “서에서 왔소, 문 여시오.” 했다. 밖에는 까만 짚차 한 대가 서 있고, 3명의 건장한 남자가 현관에 들이닥쳤다. 아버님을 위시하여 식모 숙자(淑子)에 이르기까지 전 식구가 현관 쪽으로 몰려왔고, 숙부 옥주(沃周)님도 파자마를 입은 채 뒤에 서 있었다.

“김 의원님, 조사할 것 있어 서에 좀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숙부님은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는지 옷을 갈아입으시더니 그들을 따라나섰다. 대문을 나서기 전 당신의 형님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떠나는 인사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진규(秦圭) 형은 밖에 나가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짚차의 번호판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 차가 시내 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는 것을 확인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날이 1949년 6월 21일이었다.

전날 초저녁, 돈암동의 백부님 그리고 경찰간부로 계시다 쉬고 있던 다섯째 숙부 계주(桂周)님이 오셔서 옥주(沃周) 숙부의 외군철수(外軍撤收) 등 최근의 정치적 행보에 대하여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4형제의 대화가 심상치 않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계주(桂周) 숙부는 국회 휴회 중이니 틀림없이 연행 구속할 것이라면서 일시 피신하는 것을 간곡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옥주(沃周) 숙부 고집이 대단한 분이라 “외군철수, 뭐 그것이 죄인가, 하나도 잘못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도망을 다녀!” 하시자, 백부님도 수일 전 이미 구속된 이문원(李文源) 의원 등 3명의 이름을 거명하며 “잠시 좀 피해 있거라.” 하고 종용하셨다.

그러나 옥주(沃周) 숙부는 너무 당당하셨다. 이 때 내가 느끼기를 옥주 숙부는 죄진게 없구나, 음모에 가담한 분이 아니구나라고 나는 심정적으로 확신했다.

다음날 도하(都下) 신문(新聞)에 국회 프락치사건, 즉 남로당의 지령으로 외군(外軍)철수를 주장했고, 국가를 누란(累卵)의 위기에 끌어넣는 범죄로, 국가보안법을 걸어 구속했다고 발표가 났다.

13명의 명단도 발표되었다.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전 조선공산당 최고위원에서 전향한 분) 그리고 전북 순창 출신 의원 노일환(盧鎰煥), 이문원(李文源), 박윤원(朴允源), 김옥주(金沃周), 강욱중(姜旭中), 김병회(金秉會), 황윤호(黃潤鎬), 최태규(崔泰奎), 이구수(李龜洙), 배중혁(裵重赫), 서용균(徐容均), 신성균(申性均) 제씨(諸氏)였다.

1949년 9월부터 세 차례의 재판으로 드디어 1950년 3월 14일 예심에서 남로당에 가입하여 북의 지령을 받았다는 주모 급 2명 노일환과 이문원은 10년, 나머지 전원도 유죄가 인정되어 2년에서 8년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옥주(金沃周) 의원은 중간 정도로 6년이었다.
 
죄목은 북쪽 지령에 의해 국회에 외국군 철수안을 상정하고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면, 국제연합 한국위원회에 「외군철수」를 주장하는 연판장을 제출하는 등의 임무가 주어져 이를 이행했으며, 2차 지령은 ①헌법을 개정, 대통령 직선제로 바꿀 것 ②대미 무기청구(對美 武器請求)를 저지할 것 ③식량정책을 규탄할 것 ④예산안 반대투쟁을 하며 ⑤내각 총사퇴 요구 투쟁을 전개할 것 등이었는데 이들은 주로 남로당 해주(海州)지도부의 조직책 이삼혁(李三赫)과 남로당 고위급 하사복(河四福)을 통해 노일환과 이문원 의원에게 전달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 동아일보의 1949. 6.23.자 국회프락치사건 검거선풍 기사

지금의 잣대로 재어보면 그 정도의 죄목으로는 실형이 언도될 만한 꺼리가 못 되었으나, 당시로서는 건국초기이고, 국회에서 일어난 용공적(容共的) 집단처사인 만큼 집권층에서 대단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도인물 두 사람만이 공산당에 입당, 지령에 의해 움직인 것이 사실이라 하자. 그리고 김약수(金若水) 부의장은 이 소장파(少壯派)들을 당신의 부의장 권위로 조직적으로 용공노선으로 이끌어 갔다고 하면 범죄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동조했다’ 하는 10여 명의 의원들은 과연 충분한 범죄요건이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국회 프락치사건은 조작된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고, 그러한 각도에서 많은 연구와 비판의 글들이 나오게 되었다.

어느 구석을 봐도 이들 10명은 개별적으로 지령을 받았거나, 입당한 사실이 규명된 바 없고, 죄가 있다고 하면 국회에서 외군철퇴(外軍撤退)등 집요하게 정권을 비판했다는 것 밖에는 불거진 것이 없으니 반대세력의 조직적인 제거음모의 희생자들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로 들면 노일환 등 국회의원을 구속하게 된 유일한 증거가 된 여성 간첩 「정재한」이 은밀한 곳에 숨겨 가려던 암호문서는 제출되었으나 정작 특수공작원 정재한은 끝까지 법정에 나타나지 않아 방청했던 미(美) 대사관 문정관(文政官) 「핸더슨」도 그의 회고록에 「정재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참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던 공안(公安)의 전설, 오재도 검사는 숙부와 「와세다」 동기동창이고, 가끔 오(吳) 검사의 노모(老母)가 만들어 주는 평양식 음식자리에 자주 초대받았으며, 서로 오고가는 친숙한 사이였다. 공판(公判) 중에도 오(吳) 검사의 어머님은 숙부에 대한 안부를 아들에게 묻곤 하면서 안타까워했다는 사실이 오(吳) 검사의 회고록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두 분이 친숙했다.

오(吳) 검사는 ‘집단으로 연루가 된 반국가 거대 사건이었으므로 가까운 친구의 고통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라고 회고록에 술회하고 있다. 이것은 이(李) 박사 눈에 가시였던 이들 소장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솥뚜껑 가지고 자라 잡는 격’으로 진행된 보복성 무리한 공안 사건으로 본다.

1949년 어느 한여름 오전, 나의 사촌형님 진성(秦成)이와 함께 미제(美製) 두루마리 휴지 두 뭉치를 들고 서대문형무소에 숙부님 면회를 갔다. 두루마리는 숙부님에게 필수였다. 치질이 심해서 두루마리 부드러운 휴지가 아니면 처치할 수 없는 어려운 신세였다. 그 좋던 얼굴이 쇠퇴해 많이 힘들어 보였다.

가족 안부 정도를 교환하고 나서 나는 대뜸 숙부에게 “작은 아버지! 빨갱이입니까?” 하고 못된 질문을 큰 소리로 내던졌다. 수일 전 정동 대법원 법정에서 공판이 있을 때 13명이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입정하던 광경을 보던 배재중학생 수십 명이 자기들 삼층 교실에서 내려다 보면서 ‘빨갱이 죽여라! 빨갱이 죽여라!’ 고함으로 합창하던 것이 생각이 나 이런 당돌한 질문을 했다.

이때 순간적으로 숙부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아, 아, 하, 하,” 하며 한참동안 정신없이 웃어 재끼더니 조용해지셨다. 눈물이 고이고 슬픈 표정의 그 얼굴에 “나는 아니야, 너무 억울해!” 하는 징표가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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