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_2 (183회)
  제22장 나의 청소년기와 해방공간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숙부는 공산주의자가 가장 경계하는 대지주(大地主), 부르조아의 아들에다가 대학을 나온 「인테리」였다. 태생적으로 핵심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데다, 공산주의가 가장 싫어하고, 「아편」이라고 매몰차게 치부하는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숙부님 내외분은 우리 집안에서 제일 먼저 개종한 분이었다. 국회에서도 신도회(信徒會)에 적극 참여했고, 여기에서 금산 출신 임영신(任永信) 여사를 만나 ‘누님, 동생’ 하고 가까이 지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숙부가 국회 단상에서 외군철수(外軍撤收)를 소리 높여 외치고, 이(李) 정권을 매몰차게 몰아 붙이는 것이 안타까웠던 임(任) 의원은 상부(上部)와의 교감이 있었던지 ‘국회의원 사퇴하고, 전남도지사로 가도록’ 종용하기까지 했고, 이 사실을 안 백부님은 삼청동 국회 독신자아파트(청와대와 총리 공관 사이에 있었음)로 옥주(沃周) 숙부를 찾아가 이 제의를 수락하도록 간곡히 타이르기까지 한 일이 있었다.

이분들이 억울하게 당했다 하는 증거는 6 .25 인민군 철수 때 10명 중 막내 서용균(徐容均, 온양 아산 출신) 의원은 북향(北向)을 거부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자수한 일이 있다. 서(徐) 의원은 바로 방면되었고, 정계에 다시 투신하기 위해 무죄를 주장하며 소송의 속개를 강력히 주장하기도 한 것을 보면 죄가 별것이 아닌 것이 증명된 것이다. 

서(徐) 의원은 군검경(軍檢警) 합동수사실에서 6.25 수복 직후, 내가 만나 뵌 적이 있다.

내가 연락장교단에 있을 때인데, 퇴근해서 필동 3가 집으로 돌아왔더니 우리 ‘어머니’가 옥주(沃周) 숙부 문제로 CIC에 연행되었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조사단이 종로 2가 국일관을 쓰고 있는 사실을 알고 쫓아가서 어머님을 면회를 했는데, 내가 군복을 입고 있었고 연락장교단 신분증이 있어 면회는 쉽게 허락이 되었다.

어머니가 계시던 10여 평 남짓한 조그마한 방을 열심히 쓸고 있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서용균(徐容均) 의원이었다. 어머니가 인사를 하라고 해서 손을 잡았다. 제헌의원(制憲議員)이라는 위풍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청소하는 아저씨라고 하면 딱 맞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당국에서 청소를 시켰는지 아니면 주변이 지저분하니까 자진해서 빗자루를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되 나에게는 몹시 애끓는 감정이 생겼다. 살기 위해 사람은 한없이 비굴해 질 수 있구나,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대는 인민군이 들어온 6.25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부님은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출옥했다. 일제시대 때부터 형무소 생활에 이골이 생겨 옥살이는 어렵지 않았고, 형기 6년을 견뎌보기로 결심하셨다고 했다. 출옥하여 삼청동 국회아파트에 「프락치」 일행과 소일하면서 가끔 돈암동 큰댁과, 필동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우리 어머님과 많은 대화를 하셨는데, 아현동 우리 집에서 연행된 후 기소될 때까지 약 3개월의 생지옥을 말씀하시는 데는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었다.

방첩대, 헌병까지 포함된 군(軍), 검(檢), 경(警)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어 필동(필동의 양반촌 자리) 헌병사령부에서 본격적인 개별조사를 강도 높게 받았다. 
 
▲ 김약수 제헌의원

‘명색이 이 나라 헌법을 기초한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懷疑)로 저항도 해보고, 계엄령하도 아닌데 군(軍)이 조사에 개입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요 위법한 짓이라고 항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찜질이었고, 수시로 당하는 전기고문은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다.

여름철인지라 활딱 벗기고 나신으로 콩크리트 바닥에 꿇어 앉히고 물고문 등을 가하는 것을 당하고 나니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가, 인간은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형수님, 저는 이제 아이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는 숙부님의 말씀에 어머님은 펑펑 우시고 말았다.

‘관제공산당(官製共産黨)’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치를 떨게 만들어 놨으니 당시 공산당이 자동 제조되는 경우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숙부님은 9.28 서울이 UN군(軍)에 의해 수복되기 직전 필동 어머님에게 작별 인사차 오셨더란다. 어머님은 “북으로 가지 말고 여기 남아 자수하고 가족하고 같이 살면 좋겠다.” 고 간곡히 권했으나 “이(李) 박사가 나를 잡으면 또 죽일라 할 것이니 가야한다.” 고 하면서 떠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담요 하나에 우리 아버지 겨울 내복을 하나 싸서 드렸다고 한다.

숙부사건은 우리 가문에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군, 검, 경 합동조사가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화가 다가온 것은 시골 우리 고을의 우체국장(일제 때 우리 아버님이 국장을 하셨던 그 우체국)을 하고 있던 우리 집안의 종손(宗孫) 진석(秦汐) 형님이었다.

불문곡직하고 광양경찰서에 연행된 형님은 그날 저녁부터 매질과 전기고문을 당했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서울 국회의원 숙부에게서 반정부(反政府) 지방조직(地方組織)을 구성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진석(秦汐) 형님은 정치와는 아주 무관한 분이고, 야구와 음악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좀 특이한, 조용히 있기를 원하는 분이였다. 

억지조사였는데 그때 경찰들은 증거도 없이 빨갱이라고 하면 무조건 때려잡고 보는 저질경찰의 극치였다. 아니면 그만이고, 어디 가서 호소할 수도 없는 불쌍한 군상들이 그때의 우리 대중이었다.

형제분들 여럿이 정부기관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은 건들지 못하고 힘없는 시골 우체국장을 하고 있는 조카는 증거도 없이 매질하고, 고문하고, 가장 비열하고 재기불능의 경찰의 당시 행각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공산당은 밉지만, 많은 반정부(反政府) 인사를 양산했던 시기였다. 사악한 공산당을 때려잡기 위해서는 일부 희생은 불가피했다고 하는 양비론을 주장하는 부류도 있지만은 그것은 구실에 불과하지 당한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가 없다.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었다. 

종손(宗孫)인 종형(從兄)은 6.25가 우리 고향을 휩쓸자 전일에 경찰에 당했던 무서움으로 재빨리 피신했다. 200리 길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담양군 지실 정(鄭)씨(송강 정철의 후예) 집성촌에 있던 처가에 들어가 사변 동안 거기서 무사히 지내고 귀가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대법원 원장이신 김병노(金炳魯) 선생의 노부인(老婦人)이 후퇴를 못하고 친정인 지실에 들어와 피난을 했는데 형님과 같은 집에 계셨다. 좌익 계열이 마을에 출입하면 대밭 깊숙이 들어가 하루 종일 숨어 지내기도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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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프락치의 운명 (18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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