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의 운명 (184회)
  제22장 나의 청소년기와 해방공간

국회 프락치의 운명

서용균(徐容均) 의원을 제외한 제헌의원 소장파 일행 12명은 9.28 수복 3일 전 돈암동 종점에서 집결해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도보로 미아리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향했다. 

평양을 거쳐 계속 북상하다가 중공군(中共軍)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다시 평양 근처로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된다. 처음에 이분들은 재북(在北) 평화통일촉진위원회를 결성, 대남(對南) 선전활동에 투입되었다.

남로당 계열로 분류되어 일정한 남쪽 지분으로 여기저기 요직을 맡기도 했지만 북로당의 견제에 항상 신경을 써야만 했다. 옥주(沃周) 삼촌은 그의 특기인 인화와 과단성으로 교통부상(交通副相) 또는 평양 인민위원회 부위원장(부위원장 숫자는 약 5,6명이 되었다 함)을 맡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1953년 8월부터 불기 시작한 공개적인 박헌영(朴憲泳) 중심의 남로당 숙청 회오리가 일어나면서부터, 남쪽 국회의원 출신들도 하나 둘, 도태되기 시작했다. 첫 숙청 타겟은 남로당 출신 거물 12명인데 그 중 이승엽, 임화 그리고 이강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박헌영(朴憲泳)의 가장 측근들로서 공산이론가였고 전략가들이었다. 첫째 죄목은 ①미(美)제국주의를 위하여 감행한 간첩행위 ②공화국정권의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의 음모행위 등이었다. 이들에게는 가장 치사한 죄목이 씌워진 것이다. 그리고 12명 중 2명을 제외한 10명이 사형당하는 충격적인 재판이었지만 단심(單審)으로 종결되고, 재판은 불과 1953.8.3~6일까지 4일간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55년 12월에 와서 박헌영에 대한 재판이 열렸는데 이때 증인으로 삼년 전에 사형이 되었어야 할 「이강국」과 「조일명(문화선전성 부상, 전 해방일보 편집국장)」이 살아서 박헌영의 죄과를 고발하는 증인으로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은 박헌영의 재판에 대비해 사형 집행이 유예되었던 모양이다.

박헌영도 자신이 미국의 간첩이었음을 순순히 자백했고, 그 내용이 소상히 재판기록에 나와 있다.

①언더우드와의 만남에서 미국을 동경했다.
②미 군정의 정당 담당 「버치」중위와 수시로 만났다.
 
▲ 김일성(왼쪽)과 박헌영(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장 정원에서 환담 중)

③월북 후에는 해주 강동학원(江東學院)에서 「하지」중장의 지령을 받고 남북 대립, 분열 사상의 고취에 전력했다.

④미국 2중간첩인 「하와이」교포 ‘현 앨리스’와 ‘이사민’을 평양에서 간첩죄로 체포하려 했는데 박헌영의 보증으로 모스코로 도피시킨 죄, 등을 모두 시인했다.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끝으로 제가 과거에 감행하여 온 추악한 반국가적(反國家的), 반당적(反黨的), 반인간적, 매국역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오신 방청인들 뿐만 아니라 더 널리 인민들 속에 알리어 매국 역적의 말로를 경고하여 주십시오.” 라고 했다.
 
박헌영의 투쟁경력, 그의 불굴의 의지로 보아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은 공판(公判) 스케치인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매우 혼란스럽다. 우리 측 기자나 외국인들이 제대로 취재했는지가 의문이다. 이런 모든 공판 기록은 평양에서 발행한 「국립출판사」 1956년 판으로 전(全) 세계에 뿌렸고, 이에 앞서 일본에서는 조총련계 현대조선연구소 1954년 판(版)에 이미 죄과가 일부 ‘폭로된 음모’ 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자기의 생명줄과도 같은 기나긴 그리고 험난했던 투쟁기록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가장 치사한 죄목인 미국 간첩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며, 확정 판결 15일 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미스터리를 도저히 풀 수가 없다.

어느 땐가 그 진실을 역사가 밝혀줄 것으로 믿는다. 서방(西方)세계로부터 북한의 실상을 알아보겠다, 감화시켜보겠다 하면서 보무당당하게 자진 입북(入北)한 사람들 중에 서방으로 다시 되돌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정신적인 이상한 질환을 앓고, 사회와 완전히 담을 쌓아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에는 어떤 불가사의한 일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여하튼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 일파가 북한 권력가에서 그 모습이 사라진 후, 남한 출신 대부분은 지방과 농촌으로 하방(下放)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그리고 건강상의 문제, 고령화 등으로 인해 그 존재가 희미해지고 지금은 거의 생존한 분이 없는 것으로 안다.
 
우리001.jpg

숙부 옥주(沃周)님은, 진규(秦圭) 형님이 KAL기(機) 납북 때 두 차례 평양에서 만나 뵌 적이 있었다. 1968년의 일이다. 그때는 평양에 계시지 않고 평양 근방 어느 농장의 관리인으로서 부상(副相) 대접을 받고 있다며 생활은 안정되어 있다고 하시더란다.

그 후 중앙일보가 북한신문을 인용해, 숙부님이 88년 10월 2일 작고하신 걸로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잡지 「민족지」에 실린 것을 보면 사망 일자가 좀 달리 나와 있다. 「민족지」의 기록에 의하면 북한이 재북인사(在北人事)들의 묘(62기)를 평양시 룡선구역에 2004년도에 조성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비문에는 ‘...김옥주 선생; 조국통일상수상자, 재북평화통일총진협의회 회원, 1914. 5.18생, 1980. 9.12. 서거, 출생지:전남 광양 진상지원...’ 이라고 새겨져 있다 한다.

숙부님 옆에는 안재홍(민정장관 역임), 현상윤(전 고려대 총장), 백관수(한민당 중진), 그리고 이광수(작가) 선생 등이 모셔져 있다. 이분들의 묘지는 원래 지방에 산재해 있었는데 2000년 이후부터 남한 인사들이 많이 방북하게 되자, 「재북인사들의 묘」라는 명칭의 공원묘역을 조성, 집중관리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회 소장(少壯) 의원들이 이 묘원에 모셔져 있다. 북한이 정통성을 얻어 보려는 각고의 노력이 엿보인다 하겠다.

 
  국회 프락치 사건_2 (183회)
  인천으로의 이사 (185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