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으로의 이사 (185회)
  제23장 인천고 시절과 나의 자화상

인천중고 진학(進學)

부산 생활은 내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참 성장하는 시기였다. 부산은 기후도 온화하고, 해산물 등 물산이 풍부했다. 

소년기를 거치면서 친구를 알아보는 안목도 생겼다. 등교 때는 이웃의 이철우(李哲雨, 6 .25 때 전사함) 군과 큰길 건너 김영복(金永福, 전(前) 국회의원) 군과 함께 도청 뒷담을 끼고 토성동 학교에 걸어 통학했다. 그날의 우리 주변의 모든 관심 「뉴-스」를 서로 소화하면서 말이다. 

학교에서는 학과를 마치기가 무섭게 공차기, 공 던지기, 수영 등 닥치는 대로 운동을 했다. 공부는 중간 정도였으며, 영어는 일찍 제법 잘 한 것 같았다. 영작문(英作文) 김학열(金鶴烈) 선생에게서 가끔 칭찬을 받을 정도로 했으니까 말이다. 완전히 부산 놈, 경남중학생이 되어가는 참이었다.

그런데 48년 봄, 아버님이 인천 우체국장으로 전근, 발령이 난 것이다. 친구도 생기고 선생님하고도 서슴없는 사이가 되어 정이 붙었는데 생소한 인천으로 가야 한다니 참 난감했다. 공직자의 자식이란 항상 이런 비애에 직면하게 된다. ‘정들자 떠나는’ 나는 이렇게 해서 중학교를 너댓 군데를 옮겨 다녔다. 따라서 친구가 전국에 깔려 있다. 희한한 일은 길에서 우연치 않게 몇 년 만에 만나더라도 부산 친군지, 인천 친군지, 금방 알아낸다. 사투리도 있지만 우선 풍기는 무엇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의 장거리 이사는 자동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차의 곱배, 화물칸을 이용했다. 부산에서 철도 화물차 하나를 세를 내서 인천까지 이삿짐을 싣고 나르는 것이다. 철도국에서 화물에 대한 책임감이 희박한 때인지라 화주(貨主)가 차에 타고 목적지까지 같이 가야만 했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기분이다. 아버님과 가족들은 객차 편으로 가시고, 형과 나와 아버님의 운전수였던 고향 선배 양우석(梁又錫) 씨가 화물차에 동행했다. 양(梁)형은 일정 때부터의 운전수로 베테랑급에 속하는 기술자였다. 

화물열차는 야간에만 움직이고 낮에는 객차에 선로를 양보하는지 대낮에는 도무지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하루 걸려 대구에 왔고, 또 하루를 걸려 대전까지 왔나보다. 순천 철도국장 숙부(叔父)께서 좀 부탁을 했을 터인데도 더디기 한이 없다. 다행히 화물칸에서 취사를 할 수 있었으나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취식을 했다. 다행히 미군 Mr. 미나토가 준 C-레이숀은 우리들에게 무리 없이 영양을 공급해 주었다.

3일 만에 영등포에 도착했다. 서쪽으로 가야 인천인데 자꾸만 북쪽으로 간다. 거대한 철교를 지나자 용산이 나왔다. 용산에서 하룻밤을 새더니 동이 틀 무렵 서북쪽으로 비스듬히 달린다. 북한으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 하며 우리는 웃었다. 한참 만에 수색이 나왔다. 조차, 열차 편성을 한다면서 또 하룻밤을 지내더니 드디어 용산으로 해서 인천으로 간단다. 하인천역(下仁川驛)에 도착한 것은 부산 출발 딱 일주일 만이다.

인천은 도시 자체가 우중충하여 밝은 부산에 비해 많이 낙후해 보였다. 인천 우체국장 관사는 전동(錢洞) 윗터 인천공립중학교 정문 옆에 위치해 있었다. 개항기(開港期)에 고등관(高等官) 사택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정말로 거대했다. 갈지자 형태로 「모줄」 세 개인 「야시기」집이었다. 난방을 하려면 겨울에 고생깨나 하겠구나, 싶었다. 

형은 진주농림에 다녔기 때문에 국내 실업계 상고로서는 가장 역사가 긴 인천상업학교에 전학원서를 넣었고, 나는 일반 중학(中學)인 가까운 인천중(仁川中)에 가서 간단히 「테스트」를 받고 한 이틀 집에서 기다렸다. 
 
▲ 1948년 인천중고의 모습

사흘째 되던 날 두루마기 차림에 검정 가방을 들고 희끗희끗한 머리의 교장선생님이 우리집 현관에 들어섰다. 좀 올라오시라는 아버님의 강권을 출근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신 교장선생님은 “진휴(秦休) 군! 영어는 괜찮은데 수학이 부족합니다. 우리 학생 따라가려면 좀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오늘부터 보내시지요.” 딱 분질러 말씀하시더니 휙 되돌아 나가신다.

아버님이 아래 길 쪽 계단을 따라내려 가시며 배웅을 하셨다. 이렇게 나의 인천 생활이 시작되었다. 영원한 우리의 스승, 길영희(吉瑛羲) 교장선생님과의 첫 대면도 이때 이루어졌다. 첫 느낌은 ‘당신의 학교에 대하여 자부심이 대단하시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반(班) 배정을 받고 물리, 수학 과목의 임순홍 선생님 반에 들어갔다. 의외로 학생들이 경중(慶中)의 발랄한 기질과는 좀 다르게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에게 다가와 자기소개와 인사를 땡기는 급우도 있었다. 집이 가까우니 종소리 듣고 쫓아와도 지각은 면했고, 가끔 점심도 집에 가서 먹고 달려오기도 했다.

바로 이웃에 세관장(稅關長) 관사, 식량공단(食糧公團), 기상대(氣象臺) 관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조용했다. 바로 위쪽에 과거 독일인 대저택이었던 인천각(仁川閣)이 위치해 있고, 항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능선을 낀 공원은 인천의 명물이었다. 산책과 사색을 위한 최고의 장소였다.

좀 친숙해지면서 급우들과의 대화도 늘었다. 지방학생이 많았다. 인천시내 학생은 반이 못되고 주로 옹진, 강화, 김포, 화성, 부평, 그리고 충남의 당진, 서산 등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다. 부모를 떨어져서 독립생활을 하다 보니 성숙해 졌나 보다. 모두 점잖았고, 공부도 잘 했다. 교장선생님이 자랑할 만한 인재들의 집성「아카데미」였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존 듀이의 교육철학을 신봉하신 길(吉) 교장선생님은 전국에서 우수한 교사들을 삼고초려하여 모셔왔으며, 그 중에는 피천득(皮千得), 조병화(趙炳華), 선우휘(鮮于輝), 박충집(朴忠集), 이인수(李仁銖) 제(諸) 선생이 계셨으며 그리고 체육담당 김승만(金勝萬) 선생도 모셔왔다.

특이한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영어회화를 맡아주신 이상규 선생님이다. 교장선생님과의 약조가, 일단 학교에 들어오시면 무조건 영어로만 말씀하도록 되어 있었다. 60에 가까운 노(老) 선생님은 1920년대에 미국 「오하이오」주(州) 웨스리언 대학 화공과를 졸업하시고 목회(牧會) 활동을 하시다 귀국한 분이다. 

일정 때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시고 많은 감시와 박해를 받으셨고, 해방 후 인재가 부족하던 시절에 그 실력이면 청장(廳長)이나 장관(長官) 한 자리는 차지하실 만한 분인데 일체 입신출세에는 담을 쌓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붙들고 사신 분이었다.

길(吉)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학교로 오셨고, 학생들이 인사를 하면 무조건 “Very Good.”, “선생님, 건강이 좋으세요?” 하고 물어도 “Very Good.” 하셔서 별명이 “Very Good” 선생으로 통했다. 그때 당시 대부분의 영어교사들은 일제 시대 배운 영어라 딱딱하고 입시 위주이며, 문법을 중심으로 도식적 영어를 가르쳤으나 이(李) 선생님은 실용영어, 회화에 치중해 우리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다른 영어선생도 본토배기 생활영어에서 막히는 것이 있으면, 이(李) 선생님이 풀어주시곤 해서 안팎으로 인기였다. 선생님으로 인해 인천중 출신은 사변 때 통역장교와 후방기지의 통역으로 활동한 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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