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중(仁中)의 선생님들 (186회)
  제23장 인천고 시절과 나의 자화상

이(李) 선생님이 우리 반 수업시간에 들어와 ‘손이 시리다’를 영어로 해보라 하셨다. 아무도 답하는 학생이 없자 Cold란 단어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두가 “춥다, 입니다.” 했더니 “Hands Cold” 하시면서, “영어에는 ‘시리다’는 표현이 없어, 그러니 Cold이면 충분해. 스콧랜드 산악지대에 사는 농부들은 동사(動詞) 200여개를 가지고 평생을 불편 없이 살고 있다.” 아는 단어를 적절히 조합하면 훌륭한 영어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응용’과 ‘말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셔서 우리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셨다.

이 “Hands Cold”는 아침에 교무실에서 이(李) 선생님에게 슬그머니 다가선 영어교사 한 분이 “선생님, ‘손이 시리다’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겠습니까?” 한 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영어에 대해 많은 깨침을 얻었고, 이로 인해 미국여학생 Ellen Young Chang(장기영 전 체신장관의 딸, 미국 인디애나주 출신)과 교제를 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얻은 회화실력은 생사를 넘나들던 6.25사변 때 그 진가를 발휘해 주었다. 대소작전(大小作戰)에 참가하면서 고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대과(大過) 없이 통역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또 한 분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은 나의 담임을 두 번 맡아 주신 임순홍 선생님이다. 수학(數學)과 물리(物理)의 명강의를 해 주신 임(林) 선생님은 북간도의 고아 출신으로 훌륭한 양모(養母)님을 만나 경성고공(京城高工) 광산학과를 일등으로 졸업하신 분이다. 

칠판에 물리학 도면을 그릴라치면 색분필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지금의 CAD, CAM에 못지않을 만큼 매끈한 도면을 작성했다. 강의가 끝나면 칠판을 지우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리고 담임하시던 반 학생 개개인의 신상을 잘 파악하고 계셨고, 「다이나믹」하게 이끌어 가셨다. 양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이 양모님은 내가 모시던 정일권(丁一權) 전(前) 총리가 용정(龍井) 광명중(光明中)에 재학 중일 때 특별히 보살펴 준 인연이 있는 그런 분이었다. 

할머니와 정(丁)총리가 再會할 수 있도록 주선해 드렸다. 나는 스스로 수학이 부족했기 때문에 임(林) 선생님의 수업에는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인중(仁中)은 학생들의 체력단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교장의 “건강한 몸에서 건전한 생각이” 라는 케치프레이즈가 있었다. 아침에 등교하면 교장선생님이 두루마기 차림으로 학생들 맨 선두에 서서 운동장 두 바퀴를 도시고 들어가셨다. 이 조깅 행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계속되었다. 달리기는 우리들 운동의 기본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일인일기(一人一技)로 무슨 운동이든 뛰도록 만들었다. 나는 처음에 축구를 해 봤다. 내 체력에는 좀 과했다. 투창도 해 보았는데 그것도 별로였다. 그러다가 우리 집의 가통(家統)인 정구(庭球)로 돌아갔다.

아버님은 경기고보(京畿高普)에서부터 학교 대표로 정구부에서 뛰었고, 대학시절에도 계속해 동경유학생 대(對) 재(在)조선학생 간의 시합을 주도하셨다. 그리고 옥주(沃周) 숙부는 양정고보(養正高普)에서 대표선수였고, 전국대회에도 몇 차례 출전한 경험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와세다大」의 선수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어 우리 집안은 정구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주말이면 가까운 인천중 코트에 오셔서 운동을 하셨다.

난타의 상대는 M&M(주)의 고문(顧問)인 이상설(李相卨) 선배가 맡아 주었고, 물자가 귀한 시대라 연식(軟式)공을 자주 공급해 주는 아버님이 한동안 인중(仁中) 정구부(庭球部)에서 인기였다.
 
▲ 인중(仁中) 정구부 일동(1948.) / 우리 담임 임순홍 선생님, 그리고 체육담당이었던 김승만 선생님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아침 새벽이면 체육교사 김승만(金勝萬) 선생이 이끄는 유도부(柔道部)에 출입하여 몸을 단련했다. 일제 때부터 있던 도장(道場)은 아주 시설이 좋았고, 김(金) 선생님 또한 국내에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일본체육대학 출신으로 유도가 5단이요, 수영, 농구, 배구 등 모든 체육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과시했다. 체구도 늘씬하고 건장했다.

구령이 일품이어서 조례 때 교내가 쩌렁쩌렁했다. 원래 공부를 잘하는 학교는 운동이 시원치 않은 법인데 이분 덕으로 유도만은 인천시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켜나갔다. 나는 이분께 매료되어 열심히 아침운동에 참가했고, 체력을 단련할 수 있었다. 사변 때문에 모두 헤어졌는데 휴전 후 부산에서 복학한 다음 우연치 않게 동대신동에서 김(金) 선생님을 다시 만나보게 되었고, 한국해양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인중(仁中) 생활은 즐거웠고, ‘하면 된다’ 는 자신감도 생겨났다.

그런데 한 가지 나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좌익학생들의 집요한 소란이었다. 툭하면 강당에 집합하고, 학교와는 관계가 없는 의제를 제기하여 동맹휴교(同盟休校)를 결의하고, 구호를 외치면서 학교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휴학(休學)을 결의할 때에는 반드시 각본이 있었다. 강당 집합은 하교(下校) 직전에 그리고 주동자가 단상에 올라가 열변을 토하고, 규탄의 강도가 높아 가면,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 하는데 옳소, 하는 자리가 전 강당에 골고루 퍼져 있어 마치 집합한 전 학생이 옳소, 에 전부 참가하는 것 같은 「Set Work」를 구사했다.

또 부평, 부천, 소사, 오류동에서 다니는 통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시간에 쫓기다 보면 무조건 옳소에 참여하고, 어느덧 의제는 결의되고 만다. 반대 토론의 여지가 없고, 우파학생 그리고 중도학생들은 좌익학생들의 기세에 눌려 꼼짝을 못하는 희한한 상황이었다. 

경남중(慶南中)에서는 이런 좌익학생들의 표면적인 움직임이 없어 인중(仁中)에서의 이런 일들은 나에게 아주 생소하고 불안했다. 그리고 교사들 중에서도 좌익거물들이 존재해 학생들을 수족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인(詩人)으로도 알려진 한(韓) 모라는 분이 우리 국어선생으로 계셨다. 시(詩) 강독을 한다길래 당신의 하숙방으로 갔다. 7, 8명이 모인 이 강독(講讀)에 한 두 편의 시를 해설하고서는 이념(理念) 강독으로 들어가는 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외군철수(外軍撤收)와 5.10선거 반대였다. 다음부터는 강독회에서 발을 뺐다.

5.10선거를 며칠 앞두고 진규(秦圭) 형이 만신창이가 되어 밤늦게 돌아왔다. 아버님께 들키면 야단나니까 방으로 살짝 들어서더니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버렸다. 궁금해서 연유를 물어본 즉 ‘집에는 기계체조하다 철봉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맞추자고 제의’ 한 다음 하는 이야기가 학생동맹 아이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좌.우 이념갈등은 우리 집에도 드디어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형은 진주에서 혼자 하숙하면서 아마 우익학생단체인 학생연맹에 가입하고 진주 지역의 감찰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인천으로 이주(移住)한 후에 인상(仁商)에 전학하기가 무섭게 인천 지역 학생연맹에 쫓아가 감찰부장이 되고 서울에도 올라가 이철승(李哲承) 씨를 면담까지 하고 온 「베테랑」 우익학생이라는 것을 뒤에 알았다.

기계체조도 하고, 권투도 소싯적에 배운 터라 몸이 빠르고 한가락하는 처지가 되어 그 몸을 학생운동에 써먹기 시작했다. 만일 1968년 평양에 잡혀 갔을 때 학생연맹 출신이라고 고백했으면 반드시 억류되었을 것이라고 당시의 아슬아슬했던 일을 회고담으로 지금도 나에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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