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영희 교장 선생님 (187회)
  제23장 인천고 시절과 나의 자화상

집단폭행 사건 이후 나와 같은 학년이지만 다른 반에 있는 좌익주동인물이 나에게 슬쩍 다가서더니 “자네 형, 조심하라고 해!” 한 마디 하고 꺼졌다. 나의 형에 대한 공격이 이미 그들의 작전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섬뜩했다. 얻어 맞으면 나는 방어능력이 없으니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5.10선거를 향해 정국(政局)은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인천시내에도 매일 불상사가 일어났다. 파출소가 수류탄으로 공격받고, 드디어 아버님이 계시던 우체국에도 교환실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여자 한 사람이 병에 휘발유를 그리고 도시락에 기름을 묻힌 솜뭉치를 가지고 2층 교환실에 나타나, 교환대 한쪽 구석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그어댔다. 

삽시간에 불이 확 붙는데 이 여성은 작전에 미숙했는지 화상을 입어 더 이상 조직적인 방화를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것을 근방에 있던 전화계장 김경태(金敬泰) 씨가 재빨리 숙직실에서 이불을 끌어다 덮어 진화에 성공했고, 그 여성은 경찰에 인계되었다.

전화계(電話係) 여주임(女主任)도 여성동맹원이라는 것이 밝혀져 인천우체국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김경태(金敬泰) 씨는 6.25사변 때 후퇴를 못하고 있다가 연행되어 인민군 9.28 후퇴 때 총살되어 아깝게 세상을 떴다.

5.10 무렵, 좌익 활동은 절정에 이른다. 심지어 아침 등교길에 동산중(東山中), 인상(仁商) 쪽의 좌익학생이 떼를 지어 인중(仁中) 정문에 와서 “외군철수! 총선반대!” 구호를 외치며 인중(仁中) 좌익학생을 위한 지원데모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침 체육교사 김승만(金勝萬) 선생이 뛰어와 이들 학생들에게 소리소리 질러 쫓아버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후기(後記) - Ⅰ
「길영희(吉瑛羲) 교장선생님을 추모하며」

길(吉) 교장선생님은 참 스승으로서 우리들에게 많은 일화를 남기셨으며,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데 있어서, 그리고 삶의 질을 닦음할 때 선생님의 가르침이 나에게 많은 은혜가 되었다. 여기에 나의 동기(同期)인 심재갑(沈載甲) 형의 글 「영원한 스승! 吉 . 瑛 . 羲」를 발췌하여 나의 회고록에 남길까 한다.

선생님은 1900년 평안북도 희천에서 출생, 평양고보(平壤高普)를 졸업, 경성의전(京城醫專)에 입학하였다. 3.1운동으로 의전에서 퇴학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다음, 늦게 일본광도고등사범에서 수학(修學)하시고 졸업 후 일시 서울에서 몇몇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 민족교육을 위한 사림 농과대학을 세울 계획으로 함남(咸南) 안변의 황무지를 개간하시기도 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시고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개설하고 농촌 계몽운동, 원예강습회 등 성인교육에 주력하셨다. 해방이 되자 인천시민 유지들과 학생들의 강한 권유로 일본인학교였던 인중(仁中)의 교장으로 취임하셨다. 우수한 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대학교수진(大學敎授陣)에 버금가는 실력진영을 갖추고 학교재정이 한때 대단히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보결을 받지 아니하였다. 
 
모든 것이 솔선수범이고 일인일기(一人一技) 운동을 적극 장려하여 오후에는 마음대로 뛰어놀게 하는 특이한 심신교육을 실천하셨다. 그리고 변영태(卞榮泰), 현상윤(玄相允), 유진오(兪鎭午), 백낙준(白樂濬), 설의식(薛義植), 함석헌(咸錫憲) 선생 같은 명사(名士)들을 수시로 초청해 학생들에게 명강연을 듣게 했다.

별명이 석두(石頭)인 교장선생님은 고집도 대단하셨다. 전국 최초로 무감독고사제(無監督考査制)를 실시하여 큰 여론의 반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선생님의 지론은 “제자들을 못 믿고 눈에 쌍심지 켜고 감시하는 선생이나, 선생 몰래 슬금슬금 훔쳐서 점수를 올리는 학생이나 무엇에 쓰겠는가?” 
 
▲ 우리의 영원한 교장 선생님의 기념사업을 위해 40년을 수고해온 나의 동기 심재갑 회장

학년말에 낙제생이 열 명 넘게 나오자 교장이 모두 교장실로 불렀다. “부정의 유혹 대신 낙제를 택한 너희들은 우리 학교의 양심이다.” 교장도 학생도 부둥켜 안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낙제생들에게는 1년 장학금이 수여되었다.

선생님은 국민복을 평생 입으시고, 겨울에는 한복 두루마기가 정장이셨다. 따라서 넥타이를 매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문교부장관, 사범대학장직을 권유 받았지만 인중(仁中), 제고(濟高)에 뼈를 묻겠다고 하며 끝까지 사양하셨다. 

전교생 명단을 교장실에 비치해 놓고 매일매일 전교생 이름과 함께 신상에 대한 정보를 외우시고 하셨다. 내가 6.25사변이 끝나고 대학시절에 모교(母校) 모임에 참가했을 때인데 나의 성(姓)을 부르며 “김(金)군!” 하며 반갑게 맞아 주시면서 아버님의 안부까지 물으시는 데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와 선생님 간에 또 한 가지 더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다. 아버님이 인천 우체국장으로 일 년 남짓 계시다가 서울 체신부 총무과장으로 부임하시자 나는 부득이 인천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숙도 여의치 않고 해서 서울 인천 간 기차통학을 하게 되자 아버님이 마침 경기중(京畿中) 이관섭(李寬燮) 교장이 아버님과 고보(高普) 동창인지라 전학(轉學)을 부탁했던 모양이다. 

OK가 나서 인천중(仁川中)으로부터 전학증을 띠어다 경기중(京畿中)에 접수시켰는데 아뿔사, 그때 마침 경기중 부정(不正) 입, 전학 문제가 문교부 감사에 불거져 모든 전학이 동결되어 버렸다. 이(李) 교장이 아버님께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끝이 났는데, 나는 완전히 낙동강의 오리알이 된 셈이다. 

도리 없이 다시 열차로 내려가 전학증을 반납하고 인중(仁中)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이 좀 난감해 하시며 교장실에 갔다 오시더니 전학시험을 다시 치고 들어와야 한다면서 시험을 내일로 하겠다고 한 마디 하며 교무실로 들어가 버린다.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교장선생님에게도 섭섭한 감정이 북받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인중(仁中)을 떠난 지 일주일도 안 되었고, 그동안 인중(仁中)에서 닦은 학력이 전학증 하나로 소멸된 것도 아니고, 섭섭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마음의 행로를 모르실 교장선생님이 아니셨다. 다 알고 계시면서도 원칙은 원칙이다.

전학증을 떼어 나갔으면 학적부에서 말소가 되었으니 복구가 되기 위해서는 전입절차를 다시 밟아야 하고, 전입에는 시험이 따른다는 원칙이 여기에 뚜렷해진다. 이 논리는 부정할 수 없는 논리이고 따라서 교장선생님의 결단은 백번 옳은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수학선생이라 당신도 좀 민망하고 어색했는지 지난 중간고사 때 출제했던 문제를 그대로 내 주어서 시험은 거의 100점을 받아 챙겼다. 그리고 영어는 본디 문제가 없었고, 이렇게 교장선생님은 원리원칙에 양보가 없었고,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은 절대 아니 하시는 강직한 분이셨다.

 
  인중(仁中)의 선생님들 (186회)
  인천고 시절의 후기와 형제자매 (1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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