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 (189회)
  제23장 인천고 시절과 나의 자화상

회고록(回顧錄)을 마무리 하면서 끝으로 나의 자화상을 그려볼까 한다.

1958년 12월 14일 부산 백화당(白花堂)에서 가약(佳約)을 맺은 후 우리 내외는 지금까지 55년의 세월을 열심히 달려왔다. 「단테」의 말대로 그동안 우리는 ‘사랑과 미움 가운데 사는’ 평범한 부부(夫婦)로서 ‘사랑을 열심히 택했더니’ 사랑을 얻게 되었다. 최인호 선생이 ‘하루하루가 축제이다’ 하고 설파했듯이 우리 생활은 지금도 하루하루가 축제이고 생산적이다.

아침에 기상하기 힘들다 해도 ‘노화(老化)는 살기 위해 적응하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살자는 것이다.’ 라는 성현의 말씀을 되뇌며 벌떡 일어난다. 영롱한 아침햇살 속에 우리의 하루 일정이 번쩍인다. 하고 싶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축복이 아니겠는가? 

결혼 초기 서로의 관습의 차이, 개성(個性)의 마찰 등은 애교의 일부였고, 1남 2녀를 낳아 키우며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살아나왔다. 물론 굽이굽이 어려움도 있었다. 아버님의 1차 낙선으로 우리 집도 날아가고, 셋방살이로 전전하다 모시던 서종철(徐鍾喆) 장군의 도움으로 집 한 칸을 세검정(신영동)에 마련하고 한기(寒氣)를 피했던 일도 있었다. 

마련도 없이 훌쩍 떠난 미국 유학 시절, 국내에 남은 내자(內子)는 한 놈은 업고, 한 놈은 걸리며 친척 집을 찾아다니며 생활했던 일, 귀국후 택했던 공무원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월급을 타도 구멍가게 외상 값 갚고 나면 일주일을 버티기 힘들었다. 배운 깐은 있어서 자식에게는 조기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일찍 유치원에 보내야겠다고 무리도 해 봤다.

총리비서실에 근무할 때다. 2급 공무원인데 도대체 기초생활이 해결 안 된다. 일은 좀 쎈가! 화요일, 금요일에는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필기 작업을 끝내면 새벽 2~3시가 되기 일쑤고, 아침 7:30분에 차가 오면 세검정 고개를 넘어 중앙청까지 30분을 달려 8시면 박승복(朴承復) 수석(首席)에게 전날의 경제각의(經濟閣議)의 회의내용을 정리한 것을 전달해야만 했다. 

이 일을 2년, 3년을 계속하니 집에서 내자(內子)는 지쳐버렸다. 생활비가 모자라면 삼청동 큰댁, 부산 처가댁에 SOS를 요청하는데 이것도 한두 번이지, 체면이 말이 아닌지라 항상 갈등 속에서 생활이 이어졌다.

하루는 정 심사가 뒤틀렸는지 어느 날, “생활대책도 안 세워 주면서, 사람만 혹사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는 항의 내용의 「탄원서」를 대통령(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리겠다고 우기는 아내, 깜짝 놀라서 “서방님 목 자르고 싶으면 그렇게 하소!” 하며 달래고 달랬다. 글솜씨가 꽤 좋고, 고집이 보통이 아니니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벌이 재주가 없는 남편 믿다가 쪽박을 차겠다 싶었는지 직접 방안을 구해 와 가내수공업으로 봉제도 시도해 봤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때쯤 같이 근무하던 김형무(金炯武) 씨의 주선으로 홍제동에 터를 하나 구해서 집을 신축해 보기로 했다. 세검정 오두막을 팔고 그 밑천으로 홍제동에 단층주택을 하나 지어 모처럼 주방 하나, 거실 하나, 침실 두 개의 집이 생겼다. 그런데 이듬해 봄비가 내리는데 천장에서 물이 샌다. 아마도 슬라브를 치던 날, 갑작스러운 11월의 조기(早期) 한파로 슬라브가 제대로 양생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기술자의 진단 결과 슬라브 보강공사를 하고 그 위에 2층을 지어야만 누수를 완전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도리가 없었다. 빚을 내서 2층을 올리니, 45평의 큰 집이 되었다. 나의 능력으로 이 집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빚도 정리해야 하니 도리 없이 팔고 또 옆에 있는 공터를 사서 우리가 살 집을 또 한 채 지었다.

이러다 보니 1년 남짓에 집을 세 채 짓는 결과가 되었고 건축에 일가견이 생긴 것이다. 내자(內子)는 이 분야에도 길이 있다 싶어 본격적으로 집장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역시 「노가다」 일이 부녀자에게는 좀 힘든 일로 생각해 자기집 하나 마련했으면 되었다 싶어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친구와 함께 광화문 근방에 국수가게라도 하나 차려볼까 하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다녀보기도 했다.

이때 마산여고의 동기인 김영옥(金英玉) 씨가 막 꽃꽂이를 시작했던 터라, 내자(內子)는 그 옆에서 어깨너머로 익히다가 선천적으로 꽃과 식물을 좋아하던 차, 마음이 확 끌리더라는 것이다. 곧 취미가 더해가고 발전 속도가 빨라 우리나라 꽃꽂이계의 원로인 고하수(高霞水) 선생에게서 집중적으로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 꽃꽂이 전시회 커팅 / 왼쪽에서 두번째가 아내이다

60년대 초에는 꽃꽂이 3대 작가(作家)가 있었으니 김임순(金任順) 선생, 임화공(任華公) 선생, 그리고 고하수(高霞水) 선생이었다. 고(高) 선생은 여고 선배이기도 해서 꽃을 익히는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꽃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상업 꽃꽂이 분야로서는 개척단계였으므로 우리나라 상업 꽃꽂이 활동으로서는 1세대에 해당한다.

내자(內子)는 좋아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열심히 했고, 많은 꽃 관계 서적을 섭렵하면서 내실(內實)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일본의 「초월류(草月類)」, 「池の坊」에 출입하면서 실습을 통한 실력을 쌓아갔고, 그쪽의 선생들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해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석란(石蘭)꽃꽂이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교실(敎室)을 개설하면서 본격적으로 꽃꽂이 수업을 시작했다. 체계적인 교습과 유연한 강의의 테크닉을 인정받아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배출하게 되었다. 

신문사의 문화강좌에도 출강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매년 두 차례씩 꽃꽂이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초창기 화훼계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서 꽃꽂이 교습용 출판물 「책」 두 권을 발간하는 노력도 해나갔다.

당시 화훼계(花卉界)에는 2대 조류가 있었다. 하나는 예술로서의 꽃꽂이, 하나는 장식적인 상업용 꽃꽂이로 분류하고 있었다. 이런 사조는 일본의 꽃 문화에서 들어온 것인데 미국, 유럽은 그런 구분이 없이 예술 꽃이 상업 꽃이요, 상업 꽃이 곧 예술 꽃이라는 「데피닛숀」으로 보기 때문에 전혀 경계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사찰 또는 귀족들의 여가활동으로 시작이 되었고, 일반학교에서도 수업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선생이라 부르고 예술로 격상해서 보는 문화가 정착한 것이다. 이런 관계로 한국에서도 초창기에는 상업 꽃꽂이를 천시하는 풍조도 없지 아니 있었다. 그러나 점차 실용주의 사회로 발전하면서 지금은 그 구분이 거의 없어졌다 하겠다.

내자(內子)는 처음부터 서구의 꽃 문화를 쫓아 장식 꽃꽂이 쪽에 무게를 두고 누가 뭐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국빈영접용, 파티용, 호텔장식용 그리고 결혼식 등의 거대규모 꽃 장식 쪽으로 파고들어 결국 성공을 보게 된 것이다. 70년대, 80년대의 청와대, 외무부 행사를 위한 꽃 장식은 대부분 내자(內子)가 수행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존슨」, 「고르파초프」, 「나카소네」 등의 VIP 영접용 꽃 장식에 실력을 발휘하여 이러한 국빈에게서 꽃에 관한 각별한 칭찬을 받은 일들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88올림픽 IOC총회, IMF총회, WORLD CUP 등 굵직한 국제행사에서 호평을 받은 것도 오래 기억에 남는 일이라 하겠다.

역시 우리나라 호텔 꽃 장식은 「호텔신라」가 「파이오니아」이다. 내자(內子)는 1978년 11월 호텔신라 개업 때부터 은퇴하던 2005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호텔신라에서 화원(花園)을 경영하면서 모든 꽃 장식을 책임운영을 해왔다. 그동안 ‘별 보고 나가서, 별 보고 들어오는’ 강행군의 인생이었다. 내자(內子)의 이야기로는 ‘꽃 가지고 원 없이 일해 봤다’ 고 하는 이야기를 지금도 자주 할 정도로 꽃과 함께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는 성공을 했다.

그동안의 우리 모든 가계(家計), 아이들의 교육비, 유학비 그리고 아이들의 혼사에 이르기까지 내자(內子)가 모두 감당해 왔다. 이런 버팀목과 지원 덕분으로 나의 공직생활은 아주 순탄했으며, 그 큰 자금을 만지고, 많은 구매행위를 해 왔지만 감사원 시말서 한 장 써본 일 없이 무사히 공무원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고마운 것은 나의 은퇴 후 소일거리가 될 수 있는 농원(農園)을 마련해 준 일이다. 농원(農園)은 나의 건강 유지의 핵심이요, 유유자적한 노년생활이 가능하도록 해 준 터전이 되었다. 내자(內子)의 꽃에 대한 집착과 사랑은 남다르다. 좀 이상한 여인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즉 ‘꽃에 미친 여인’ 이다.

나는 여기에서 얻은 것이 하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는 믿음을 나는 교훈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만약 꽃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세계도, 심지어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 이라고 설파한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의 주창(主唱)을 신봉하는 사람이 나의 내자(內子)이다. 

그리고 ‘손은 인간의 정신이 나오는 도구’ 하고 갈파한 원재훈 시인(詩人)의 탁견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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