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3, 4월경으로 생각된다. 전쟁 중이라 「인플레」가 대단히 심했다. 드디어 화폐개혁이 발표된 것이다. 시간이 촉박하니 각 부대별로 서울 「식산은행」으로 직접 가서 신권과 교환하라는 지시였다. 졸지에 2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아간 것이다.
대대 전체에서 회수한 구권(舊券)을 다섯 「더플백」에 꼭꼭 눌러 담고 스티븐스 박사, 나, 총을 가진 경비병 하나, 그리고 운전병, 넷이서 차를 타고 서울로 달렸다. 꼬박 하루 종일 운전해 어둑어둑해서 수도 서울에 도착했다. 그 을씨년스럽고 처절하기까지 했던 1․4 후퇴 후 2년 만에 정든 서울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 미군은 서울 시내 어느 부대(내자호텔로 기억한다)로 가서 일박하기로 하고, 나는 마침 성북경찰서장으로 최근 부임하신 여섯째 숙부님 댁으로 가기로 했다.
스티븐스 박사가 헤어지면서, 무엇인가를 하나 나에게 쥐어준다. “총각(Gentle-man), 젊은 혈기를 발산하는 건 좋은데 병에 걸리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실버텍스(콘돔)’을 나눠 준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와 같은 일은 후방 나들이를 할 때마다 되풀이 되곤 했다. 참 재미있는 분이었다.
정주 숙부님은 좌천되신 것이다. 막강했던 부산, 경남도의 사찰과장이었는데, 한가한 서울 변두리의 서장으로 전근 온 것이다. 당시 ‘국회의원 버스 견인사건(이승만 정권이 피난 중 부산에서 국회가 저항한다고 출근을 위해 탑승한 국회의원 버스를 몽땅 헌병 지휘 하에 렉카차로 헌병대로 강제 이동시킨 일)’ 등으로 정국이 매우 어수선했다.
이박사와 그 측근들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조병옥 내무장관은 사표를 내고, 仁村 先生(金性洙 副統領)이 사퇴하는 등 일련의 정치파동이 있었다. 아마도 「스폰서」였던 조(趙) 박사가 사임하자 숙부님이 성북서장으로 좌천된 모양이었다. 희한한 세상이었다.
다행히 숙부님의 경호요원으로 여덟째 규주 삼촌이 관사에 와 있었다. 만나자 대뜸 “시골에서는, 너 죽은 줄 알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전쟁 북새통에 1년 반을 전혀 연락이 없었으니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 은행에서 환전을 했다. 대충 무게를 재고 확인서와 함께 제출했더니 신권(新券)이 나왔다. 부피가 크게 줄어 보스턴백 하나정도가 되었다.
스티븐스 교수는 모처럼 후방에서 따뜻하고 편하게 잠을 자고 장교식당에서 제대로 된 스테이크 식사를 한 터라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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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T. STEVENS(1952.) LT PER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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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스티븐스 교수에게 한 나의 한국말 교습이 후방인 서울시내에서 본때 있게 연습됐다. 환전을 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스티븐스 박사가 서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각종 간판, 그리고 광고 등을 보는 대로 읽어 가는 것이다. 얼마 전 약 일주일에 걸쳐 한글 발음법을 가르친 바 있는데, 이것을 서울 여행길에서 복습을 하는 것이다.
“무슨 은행, 무슨 식당”하며 읽어 나가다 군데군데 벽에 붙어있는 광고 중 “임질, 매독 특효약” 을 큰 소리로 읽어간다. 그 당시 그 단어들은 듣기 심히 안 좋으므로 “It is embarrassing.” 하니까 “Why?” 한다. 정확한 단어의 뜻을 이야기했더니 대단히 잘못됐다며 “Sorry, sorry.” 를 연발한다. 오발탄이라 했다. 머리가 좋아도 이런 데서는 실수를 하는구나, 혼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탁월한 기억력은 내가 유학시절 교수님의 딸인 Kirsten에게서 다시 확인했다. 세살이 좀 못 됐는데도 Bible(성서)를 거침없이 줄줄이 읽어내도록 똑똑했다.
스티븐스 교수와 나에게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3중대 K.S.C에 위생 검열을 나갔다. 길가 조그만 마을의 빈 집을 K.S.C 중대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스티븐스 교수가 그 집 부엌 아궁이에서 입술연지(립스틱)가 선명하게 묻은 양담배 꽁초를 발견한 것이다.
이 전방에 양공주가 와 있을 수가 없는데,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여자가 그리운 곳이라 남성여장으로 신파 연극이라도 한 것일까? 별 생각을 다 해봤다. K.S.C중대 책임자를 불러 진상조사를 해서 보고를 올리도록 하고 현장을 떠났다.
보고는 희한했다. 립스틱의 주인공은 역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이었다. 춘천에서 미군 트럭 편으로 2일 전에 들어왔는데 적발이 되어, 오늘 새벽에 후방으로 보냈다고 한다.
미군 수송부대와 K.S.C요원들이 짜고 「후생사업」을 했던 것이다. 춘천에서 양구까지 오려면 헌병검문소를 10여 곳 통과해야 하는데, 완전한 군복으로 가장했다 하더라도 여자일 경우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행증 제시를 요구하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동원됐다. 휘발유, 디젤유 드럼통 한쪽의 뚜껑을 잘라내고 드럼통을 뒤집어 쓰고 그 속에 숨어서 올라 온다고 한다. 따라서 수송되는 드럼통 20여개 중 하나는 빈 통인 셈이다. 스티븐스 박사의 코멘트가 걸작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인지라! 무한한 방법이 있기 마련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