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己亥年) 1959년 새해가 밝았다. 장군들의 육본 신년하례식(新年賀禮式)이 끝나면, 친분이 있는 부관끼리 삼삼오오 모여 평소에 자주 뵙는 장성 댁을 방문해 세배를 드린다. 내가 다니며 인사하는 분은 첫째 이종찬(李鍾贊 : 육군대학총장), 유재흥(劉載興 : 1군사령관) 장군, 박병권(朴炳權 : 광주교육기지 사령관) 장군, 민기식(閔機植 : 1군부사령관) 그리고 합참에서 모셨던 김형일(金炯一 : 군단장) 장군 이런 분이었다.
당시 흔히들 장군인 서방님보다 그 사모님 계급이 하나 더 위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그만큼 부인들께서 도도하고 계급이 낮은 위관급(尉官級) 장교나 사병 취급이 공손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 부관 사회에서 박병권, 김형일 장군의 부인은 우리의 존경을 샀다. 인사를 가면 반드시 마실 것을 내 놓고, 사과 등 과일을 직접 발라 대접해 주시곤 했다. 계급에 상관하지 않고 교양 있는 처신을 해서 아주 돋보였다.
군사발전국이란 작전, 정보, 군수(軍需), 인사, 관리 등 군사(軍事)에 관한 모든 분야를 연구, 개발, 발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서였다. 그러나 그런 방대한 업무 수행을 위한 「인프라」가 너무 취약했다.
따라서 군사발전(軍事發展)이라는 거창한 기능과는 동떨어진 예산상 존치과목(存置科目) 비슷한 기구(機構)였다. 고급장교들의 대기소 구실을 했는데 유원식(柳原植) 대령, 길재호(吉在號) 중령 등 쟁쟁한 인재들이 적(籍)을 두고 있었다.
1년여의 전방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보니 내 주변에 변화가 있었다. 우선 우리 귀여운 첫딸이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이수정 산부인과에서 1959년 11월 20일 새벽에 태어났다. 초산(初産)이고 해서 걱정을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이름은 효성(孝星)으로 지었다. 엄마 태몽에 숙대 교정에 들어서는데 번쩍번쩍 금색양판 같은 물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얼른 치마에 받았다고 한다. 성(星)은 그 별이고 효(孝)는 인정 많고 착하디 착한 우리 어머니(주위의 많은 증언에 의함)의 짧은 이승의 삶을 우리 딸이 그 나머지까지 받아 오래오래 잘 살라는 뜻에서 어머님의 함자 하나를 택한 것이다. 아버님께 보여드렸더니 오행을 따져보시고 좋다고 하신다.
그동안 집도 이사를 했다. 용두동 AID주택을 팔고 조금 보태서 궁정동에 있는 로마교황청 사절 관저(官邸)와 이웃하는 이민(李民 : 영화배우)씨의 집을 사서 옮겼다. 아버님은 부잣집 둘째로 커서 그런지 재산을 모으거나 이재(理財)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 먹고 사는 것은 타고 난다고 하셨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그 많은 체신부 관사들을 직원들에게 불하(拂下)할 때 그것 하나를 잡지 않으시고 선배, 후배에게 모두 양보하셨다. 따라서 늦게 말년에 집을 구하는데 사실 많은 힘이 드셨다.
동생들을 데리고 있는 조건 아래 우리 내외가 단독으로 입주했다. 여기에 사촌동생 진식(秦式)이, 처남 문춘식(文春植) 등 대학생들이 하숙 겸 합류해서 북적대는 집이 되었다.
경무대(景武臺) 옆이라 수도, 전기 사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양호했다. 바로 아래 효자동 전차(電車) 종점이 있어 광화문까지 5분이면 갈 수 있는 매우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뒤는 삼각산, 인왕산에 둘러싸여 풍경이 매우 좋은 동네였다. 낮에는 언제나 경무대 앞 은행나무 아래서 애기 유모차를 끌고 한가하게 산보도 하고, 가로수 밑에 앉아 잡담을 해도 시비하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교통이 편리하고 한적한 곳이다 보니 나의 집은 친구들이 자주 모이는 회합 장소가 되었다.
정치는 날이 갈수록 암담해지고 사방에 반민주적(反民主的) 독선들이 난무해 갔다. 사사오입(四四五入)의 무리수에다가 야당(野黨) 탄압을 위한 「장면(張勉) 부통령 백주 저격사건」 등 우리 젊은 학도들에게 많은 충격과 실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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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명 9.28사건으로 불리우는 장면 부통령저격사건의 기사 (동아일보 1956. 10.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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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생들에게 「Modern Democracy」,「의회 민주주의(議會 民主主義)」는 이상(理想)이요, 당면 목표였다. 모든 정치학 과목과 영어원강(英語原講)까지도 서구의 Democracy에 관한 것이다. 정당론(政黨論)을 들여다 보아도 첫째,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兩黨) 의회 민주정치에 관한 것 그리고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의회정치와 삼권분립(三權分立)의 그 절묘한 관계 등이 우리 공부의 전부였다.
일제하(日帝下)에서 전제주의(專制主義)를 경험했고, 6.25라는 잔혹한 민족상잔(民族相殘)을 체험한 우리로서는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마술사로 알았다. 순화되지 않은 민족주의에다 강한 애국심에 불타는 감수성이 강한 시기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에워싼 인(人)의 장막은 그 폐해가 막심했다. 일제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정계로 나온 당시의 일부 젊은 「엘리트」 그리고 이 박사를 ‘daddy’라고 부르며 무조건적인 신앙으로 모시던 일부 사이비 지성들은 우리나라의 진로를 망치고 있었다. 그들은 노회해 가는 이박사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했다.
경무대 경찰서의 횡포 또한 막심했다. 경찰의 주요인사(人事)는 물론이요 주요 중앙기관 그리고 군(軍) 인사까지도 신원검토(身元檢討)라는 명목으로 전횡(專橫)을 일삼았다. 국가 장래를 위한 「비전」보다는 현실권력을 더 탐해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자유당(自由黨) 자체도 한심했다.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이기붕(李起鵬)씨를 내세워 대표정치(代表政治)를 꿈꾸던 당(黨) 엘리트들은 1959년 중반부터 노골적으로 전(全)사회적, 전(全)국토적으로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이제는 갈 데까지 갔고 피를 흘리지 않으면 고식적인 방법으로는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야당에 기대를 걸어봄직 한데 결정적인 단계에 가서 줄줄이 객사를 한다.
야당 지도자였던 신익희(申翼熙)선생, 조병옥(趙炳玉)박사 등 하나 둘 없어지고, 장면(張勉) 박사, 윤보선(尹普善)선생, 김도연(金道淵)선생 등이 있지만 우리들이 검토한 결과 나약한 「부르조아」에 불과했고 철기 이범석(李範奭) 장군을 두 차례 방문해서 대화해 봤지만 국가관, 애국심은 강하나 언변과 정치철학에 있어 아쉬운 점이 많았다. 대중(大衆)을 끌어 당길만한 「Eloquence」 즉 언변이 없었다. 역시 부대지휘관이었다.
군(軍)쪽에 인물을 살펴봤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소장에 대해서는 우리 동지 중에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첫째 청렴하고, 유능하고, 골프 안치고, 미군 파티에는 잘 안 나가고 등 청년장교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군(軍) 주변의 세력으로 보아 「쿠테타」의 지도자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우리들 끼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못했다. 다만 연희전문(延禧專門) 출신이요,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 배경을 가진 박병권(朴炳權) 장군에 대해서는 모두 세울만한 지도자라고 공감을 했다.
그러나 막상 군에 맡긴다고 했을 때 미군 수십만 명이 주둔하고 있고 사실상 작전권을 틀어쥐고 있는데 박병권 장군이 나서 줄까? 모두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지었다.
또한 김상협(金相陜) 선생님을 비롯한 학계에서도 인물을 물색해 봤으나 모두 넘치고 부족했다.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선생님도 그 때에는 별 활동이 없었고, 우리들에게 당시 그다지 어필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