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외과 병원 전방에는 2개의 미군 사단(美軍 師團)이 배치되어 있고, 양구읍 쪽으로는 한국군 3군단 예하 사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전선들이 그렇게 거의 고정되어 있었으나, 가끔씩 고지 쟁탈전이 중대 또는 대대 전투 규모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사상자도 가끔 나왔다. 그리고 중공군의 춘계공세, 추계공세라고 해서 대규모 포격전과, 사단 규모의 전투가 이루어지는 때는 많은 부상자가 후송된다.
2, 3일 전투가 계속 되면, 병원은 혼란의 극에 달한다. 의사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수술을 하고, 중환자는 후송하고, 죽은 자는 장례부대에 연락, 처리한다. 병원에는 환자 수송용 잠자리 헬리콥터 4대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쉬지 않고 직선거리 약 4.5km되는 거리를 왔다 갔다 날아다니며 환자를 한번에 2명씩 수송한다. 진짜로 전쟁이다.
나는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이들 pilot 장교와 친하게 지냈는데, 대부분 2차 대전 때 폭격기 조종사로 지낸 분들이고 또한 베테랑들이었다. 겁도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공중에서 엔진이 멈추면 돌덩어리처럼 곧장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져 박살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문제없어, 헬리콥터는 떨어질 때 거꾸로 프로펠러가 돌아가 무사히 지상에 내리도록 되어있어.” 하면서 “No problem!” 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것을 믿었다.
그러던 겨울 아주 추운 날, 「콥터」를 warming(조종이 용이하도록 시동 거는 것)하면서 공중에 솟다가, 병원 전선에 걸려 추락했고, 조종사는 중상을 입었다. 응급처치 후 동해에 정박 중인 병원선으로 긴급 후송된 일도 있었다.
이런 삭막한 전쟁터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쾌락이 병원에서는 존재했다. 장교의 밀도가 가장 높고 여성 간호장교가 10여 명이나 되어, 자연스럽게 장교 클럽(Officer's Club)이 호황을 누리는 것이다. 인접 부대로서 수송부대, 포병부대 관측장교들이 사용하는 경비행장 등, 병원 구성원 외에도 클럽을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인적 자원이 있었다. 클럽은 매일 밤 초만원을 이루어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고, 어느 국제도시의 유흥가 못지않았다.
주변의 사병들에게 위화감을 줄까봐, 산속 맨 구석진 곳에 약 200평 정도의 마루판 홀을 만들고, 활석가루까지 뿌려서 매끈매끈 탱고까지 출 수 있는 클럽이 있었다.
어느 날 클럽 일을 보던 행정장교인 <해리>라고 하는 준위가 다가와서 자기를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낮에는 정상근무에,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 클럽 일을 하고, 마감하면 새벽 1시가 된 후에야 잠자리에 드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것이다. 또 군(軍) 규칙에 장교는 <바텐더> 등 술 취급을 못하도록 되어있다고 하면서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아르바이트> 費도 넉넉히 주겠고, <바텐딩> 요령은 자기가 전문가이니 모든 믹싱 기술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다. 한 일주일만 익히면 운영할 수 있고, 자기가 옆에서 도와주겠노라고 했다.
<트라이얼(견습기간)> 시간을 좀 달라고 한 후 그날 밤에 클럽에 가봤다. 크리스마스 시즌 인지라 요란하게 장식도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전축을 운영하는 법부터 배웠다. 대부분 LP판으로 <그렌 밀러>의 경음악, 그리고 당대의 유행가 pop <패티 페이지> <냇킹 콜> <빙 크로스비> 등등 하루 다섯 시간을 돌릴 충분한 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술은 미국 <버번주 I.W. 하퍼> <짐빔> <캐내디안 크랍> <시그럼.V.O.>그리고 칵테일로서는 <마티니> <맨하탄> <진토닉> <탐카린스> 등과 여러 가지 맥주가 있었는데, 일본 맥주 <아사히>가 싸고 인기가 있었다. 가끔 축제나 기념일이면 샴페인, 포도주도 등장했다. 이런 희귀한 주류와 각종 안주는 동해안의 병원선과 협약이 되어 수시로「헬리콥터」로 운송되었다.
10여명의 미모의 간호장교가 깔끔하게 화장하고, 단정한 바지 차림으로 클럽 안에 등장하면, 외부에서 온, 특히 전방사단에서 온 초급장교들, 5~6개월 또는 일 년 내내 여자 구경을 못 했던 젊은 장교들은 황홀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술에 취하면 가끔 충돌도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역시 신사들이 돼서 밖에 나가 조정하거나, 동료가 데리고 귀대하거나 해서 큰 불상사는 없었다.
약 2주 정도 열심히 <해리>에게 교습을 받고, 나에게 준 칵테일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고 했더니 충분히 바텐딩이 가능했다. 1개월, 2개월 시간이 지나면서 <바텐딩> 잘 한다고 ‘Mr. Kim, No. 1 Bartender’라는 소문이 났다.
미국 장교들은 1년 근무 중 6개월이 지나면 R&R(Refreshment & Recuperation)휴가를 가는데 약 일주일 정도 일본에 다녀온다. 새로운 경험담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가 하면, 일본 예찬에 침이 마른다. 식당 배식하는 미군 K.P. 중에는 일본에서 구해온 빅 사이즈 「브래지어」 를 걸치고 배식 받는 병사들에게 한 번씩 만져보도록 하는 코메디언도 있었다.
간호장교들은 자상해서 가끔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서 구해다 주곤 했다. 주로 삼성당(三省堂) 영어사전들이 귀한 선물이었고, Tree라고 하는 간호장교는 나에게 여름용 신사복 한 벌을 선물해 주었다. 가끔 나와 야구 캐치볼을 했는데, 공을 던지면 어찌나 힘이 좋은지 내 손이 「글러브」 를 끼고도 얼얼할 정도로 손바닥이 아팠다.
왼발을 끄떡 올리고 내리꽂는 폼은 숙달된 피처의 폼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남녀 혼성팀의 선수였다고 했다. 병원 내의 부서별 <소프트볼> 시합에는 반드시 심판을 보았으며, 애매한 판정에 항의가 들어 와도 까딱하지 않는 여걸이었다.
이동외과 병원, 특히 장교클럽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미국생활의 많은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또 인생을 즐기고, 많은 사람과 자연스럽게 교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것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일례로, 후일 미국 유학 중 우리 인문학 전공은 방학만 되면 일자리가 고민이었다. 자연과학, 또는 「엔지니어」 분야는 기업, 공장 등에 2~3개월 취직해서 전공도 살리고 돈도 벌고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우리는 운이 좋아야 우체국, 도서관 등 임시직 근무요, 대부분은 해변가(Beach)의 접시닦이나, 혹은 힘이 좋으면 공사판에 가서 노동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방학 중 학교 우체국에서 근무하면서 저녁때에는 학교 앞 <어니> 라는 조그만 마을 식당 겸 바에서 이동외과병원 클럽에서 배운 술 상식으로 <바텐더> 도우미를 했었는데, 이 일로 회화능력도 기르고 쏠쏠하게 수입도 올리고, 많은 마을 사람들과 친해져, 최근까지도 편지, 카드를 교환하며 친교를 유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