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인천중학교에는 좌·우익 갈등이 심했다. 충남(忠南) 서산, 당진의 젊은 엘리트 그리고 인천 토박이에 김포, 강화, 부평, 화성 등지의 똑똑한 학생들이 집중하는 학교인지라 학생들의 사상활동도 치밀하고 조직적이었다. 걸핏하면 「강당에 집합」 시켜놓고는 몇 사람 연단에 올라가 시국에 대한 비판을 잔뜩 늘어놓고는 동맹휴학, 또는 등교거부를 결의하고 학교를 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찬성 선동자가 조직적으로 배치되어 어떤 결의를 할 때에는 구석구석에서 “옳소”를 외치며 온 장내가 「옳소」 일색으로 되도록 유도하는 탁월한 진행력을 구사하곤 했다.
때로는 나 같은 정부 관료의 자식에게도 지나치면서 은근히 말로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형님(秦圭)은 진주농업학교(晋州農業學校)에서 인천상업고등학교(仁川商業高等學校)로 전학을 왔는데 진농(晋農) 때부터 학생연맹(學生聯盟)에 가입해서 활동해왔다. 어느 날 서울에 올라가서 학련(學聯)위원장인 이철승 선배를 만나고 오더니 인천지구학련(仁川地區學聯)의 감찰부장 직함을 받아 와서 명함까지 새겼다.
며칠 후, 사건이 벌어졌다. 형님은 중학 1年서부터 권투와 기계체조에 능해 근육질의 좋은 체격을 갖고 있어 일대일의 대결쯤은 무난한 처지였다. 그런데 어느 저녁때 귀가 길에 집단 테러를 당한 것이다. 온 얼굴, 눈언저리는 물론이고 몸까지 피멍이 들어 돌아왔다. 엄하신 아버님께 들키지 않으려고 우리 둘은 무진 애를 썼고, 어머니한테도 일체 「테러(싸움)」 에 대해 함구하시도록 말씀 드렸다.
이런 사건 이후로 인천에서 살기가 무서워졌고, 좌익학생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아니 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한심스러운 것은 선생님 중에도 남로당 지하조직의 핵심인사들도 몇이 있어, 수업 도중에도 은근히 정부비판과 이 박사 비난 그리고 반미적 언사를 토로하곤 했다. 따라서 좌익 학생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한 것이 부산, 경남지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러나 좌판이 강한 대신 우판 또한 만만치 않아 유명한 선생님들도 다수 계셨다. 좌우쌍방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길영희(吉英羲)교장선생은 확실한 중심을 잡고 계셨으며, 영문학계(英文學界) 및 수필계에서 거목(巨木)의 역할을 하신 피천득(皮千得) 선생님, 현대시의 태두 조병화(趙炳華) 선생님, 김창수(金昌洙), 체육교육을 맡은 만능 스포츠맨 김승만(金勝萬) 선생님, 그리고 우리에게 사색과 무한한 자유의식을 심어 주신 선우 휘(鮮于輝) 선생님 등 쟁쟁한 교사진(敎師陣)과 특히 1920년대 미국(美國) 오하이오 주립대(州立大)에서 공학(工學)을 전공하고 교회(敎會)일과 학교의 영어회화(英語會話)를 전담하셨던 원로(元老) 이상규 선생님 등은 사상, 이념(思想, 理念)의 갈등 속에서도 확고한 교육자의 길을 가고 계셨다.
길 교장선생님은 이러한 교내 갈등 분위기를 해소시켜 보려는 노력으로 훌륭한 애국지사(愛國志士), 또한 종교인, 교육가를 수시로 초청해서 공개강좌를 열어 주셨다. 교장선생님의 단골 초청강사 중에는 함석헌(咸錫憲) 선생님이 계셨는데, 「開放(개방)된 民族主義(민족주의)」 와 「個人(개인)과 신(神)의 관계」 등의 제목으로 자주 강연을 해 주셨다. 인상적인 중학시절로 기억된다.
|
|
| ▲ '씨알 민주주의'를 주창한 함석헌(1901~1989) (c)함석헌기념사업회 |
|
조경환 군의 집은 읍내에서 약 2km 떨어진 농촌마을에 위치하고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계셨다. 다행히 집에 있어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점심까지 대접을 받았다. 국군1사단(國軍 一師團)이 퇴각하면서 집 뒷산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인민군이 도강에 성공하자 곧 시흥 안양 쪽으로 퇴각했다고 당시의 급박한 사태를 설명해 주었다(내가 군대 복무 중 모셨던 서종철(徐鍾喆) 장군은 당시 부사단장(副師團長)으로서 문산, 김포, 그리고 오류동으로 후퇴하면서 사단과 같이 했고, 끝내 한강변에서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내가 돌연 방문한 목적이 궁금했을 터이나 식량조달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부담스러워 할까봐 그랬다. 그러나 떠날 무렵 감자를 좀 캐주어 고맙게 받아왔다. 이렇게 첫날의 보급투쟁은 연습으로 끝냈다.
다음날 행선지는 마포나루를 건너 방향을 김포 쪽으로 잡았다. 한참 국도를 따라가다가 50대 중년 신사와 나란히 자전거로 행진하게 되었다. 말은 없었지만 행색으로 보아 나와 마찬가지로 식량을 구하러 온 모양이다. 나는 자전거가 아직 미숙해서 짐을 싣고 다니다 자주 넘어지곤 했다. 오늘도 비포장 시골길을 달리다 그만 깊이 파인 우마차 바퀴 턱에 걸려 넘어졌고, 그 순간 요란한 쌕쌕이 소리와 함께 기총소사를 하면서 공중으로 치솟는 전투기를 보았다. 아마도 인근에 있는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올라가는 비행기였나 보다.
그 비행기는 하늘로 솟구치며 뒤꽁무니에서 기관포를 발사해 논에 1미터 정도 정확히 물기둥을 만들며 올라갔다. 나보다 약 10여 미터 앞에 가던 사람도 재빨리 대피하는 모양이었다. 조용해지자 자전거를 세우고 앞을 쳐다보는 데, 앞선 사람이 널부러져 일어나지를 않는다. 가까이 가보니 아까 그 비행기의 기총소사 유탄에 맞은 것이다. 어깨 쪽에 구멍과 함께 흰 뼈가 드러나 보인다. 죽음은 지척에 있었다.
떨어져 있는 밀짚모자를 얼굴에 덮어주고 재빨리 근처 동구 밖 느티나무 있는 당산에 이르렀을 때 몇몇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사람들도 그 광경을 본 모양이다. “죽은 것 같아요.” 라고 상기된 소리로 전했더니 인근에 있는 손수레(리어카)에 가마니를 얹어 두 사람이 떠나간다.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너무 충격적이고 다리가 휘둘리고 힘이 빠져 보급 작전을 그만두고 귀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