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중공의 지원을 받아 침공을 강행한 김일성 정권도 민족사(民族史)에 크나큰 죄를 지었지만, 남한 이승만 정권도 「점심을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라는 허세 구호로부터 시작해서 침공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데도 국군이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 했으며, 서울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수한다고 끝까지 시민을 기만하였다. 따라서 설마 서울이 함락되랴 해서 남아 있던 많은 우리 지도급 인재들이 납치, 살해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삼선교 쪽으로 계속 걸어간다. 동성고등학교 앞 동소문 언덕길에서의 일이다. 내리막길에 군인이 탄 짚차가 앞 창문을 내린 채 기분 좋게 달려 내려오던 중 사고를 만난 것이다. 공중에 너덜거리는 전차의 「도로리」 전선이 내리치면서 운전 중인 인민군을 앞쪽에서 덮치자, 차는 차대로 처박히고 군인 2명은 발랑 뒤로 나둥그러지며 길바닥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둘 다 즉사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웅성거리는 틈에 삼선교 고갯길을 넘는데, 이곳이 인민군 진입 시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모양인지 국군 시체와 철모 등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나동그라져 있고, 몇몇 군인 시체는 전차에 깔렸는지 납작한 상태로 차는 계속 그 위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드디어 돈암동 사거리 큰댁 근처에 이르렀을 때, 시가지가 비교적 온전한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집으로 쫓아 들어갔다. 백부님 내외분 그리고 사촌들이 이 무서운 데를 어떻게 헤치고 왔냐면서 야단을 치신다. 모두 안전하시다. 아버님은 정부와 함께 남하하신 것을 보고 드리고, 점심을 얻어먹은 뒤 또 왔던 길로 필동 집으로 길을 재촉했다. 혜화동 고갯길 참사는 정리가 되었고, 짚차만 아직도 길옆에 처박혀 있었다.
귀가 도중 인민군의 공식 서울 수도입성부대의 행렬을 따라 종로4가까지 왔다. 인민군 행렬에 참가한 부대는 깨끗한 군복을 입었으며, 달고 있는 계급장도 반짝반짝했다. 그리고 참가한 각종 장비들도 모두 신품들이었다.
보기에도 사전계획이 철저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우리 국군에서 보지도 못한 주물솥(군 식사 조리용 솥가마)이 장착된 트레일러도 포함되어 있었다(아마도 소련군에서 지원한 장비 같음).
또한 미군 수송 장비도 의외로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2와1/2 트럭(소위 GMC 트럭), 그리고 짚차도 많았다. 아마도 전투 중 노획한 것도 있겠지만, 모두 깨끗하고 페인트가 온전한 것으로 봐서 재고가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후에 알았지만, 이차대전(二次 大戰) 중 랜드리스 계획(Land Lease Program)으로 많은 장비가 미국, 영국에서 소련으로 비밀리에 지원되었고, 또한 이차대전 후 중국 내전(內戰) 중 국민당 군이 보유했던 많은 미국제 장비가 중공군 손에 들어간 것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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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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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특이한 광경 하나는, 고급 인민군관이 모는 짚차 앞좌석에 덩치 큰 백인이 카키 군복을 입고 모자는 쓰지 않고 노랑머리를 휘날리면서 입성대열 옆으로 빨리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기자일 것 같으면 카메라라도 메고 있으련만, 아무것도 없다. 순간적으로 저게 소련 계통의 군사작전 고문관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전선에 배치되는 외국 보도요원, 특히 동구권의 기자가 취재차 서울에 오기에는 너무 이르고, 38선 돌파(38線 突破)는 극비중의 극비에 속했던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줄지어 지나가는 입성대열과 함께 종로4가에 도달할 즈음, 사건이 터졌다. 남산 쪽에서 입성하는 인민군을 향해 총탄이 난데없이 날아오는 것이다. 가로에 서있는 전봇대를 총탄이 치자, 전선이 끊어져 공중에서 우루루 밑으로 쏟아지고, 입성대열은 순간적으로 길 양쪽으로 산개하더니 남산 쪽으로 소총 등을 있는 대로 퍼붓는 것이다.
놀라서 효제초등학교 쪽 골목에 뛰어 들어가 전투를 피했다. 약 30분 정도 있으니 잠잠해져 계속 을지로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정돈된 인민군 입성대열은 종로 대로 쪽으로 꺾어져 광화문으로 일부 향하고, 일부는 계속 을지로4가 쪽으로 직진하고 있었다(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전날 한강대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차단된 일부 국군 패잔병이 남산에 올라가 입성하는 인민군을 향해 최후의 저항을 했다 함. 그러나 대부분의 낙오자들은 한강을 헤엄쳐 건너가거나, 운이 좋은 장병들은 나룻배를 얻어 타고 건너가 시흥에서 집결했다고 함).
을지로4가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의 사건이다. 건장하고 준수하게 생긴 약 60대 노인 한 분이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시고 파나마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뒷등 쪽으로 받치고 부서진 인민군 전차 바로 앞에 서서 소리소리 지르는 것 아닌가. “이놈들아! 누구를 위한 전쟁이냐. 당장 돌아가라! 당장 물러가라!” 이런 요지의 고함소리를 계속 질러댔고, 노신사는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런 용기가 어떻게 솟아날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독립운동을 했던 상해임시정부의 요인을 지냈거나, 광복군에 복무했던 당찬 분이겠지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약 10~15분쯤 후, 빨간 완장을 찬 사람과 전투복 비슷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노신사를 연행하는 것이다.
계속 소리를 지르지만 순하게 국도극장 쪽으로 끌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도처에 죽음과 파괴로 넘쳐나는 마귀의 자취를 본 것이다. 하루 사이에 이렇게 엄청난 변화와 끔찍한 사건들을 직접 목격 체험한 나의 일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The longest day in my life’ 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