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전만 하더라도 남산자락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 필동은 6월 25일 아침, 여느 일요일 아침과 마찬가지로 잠이 덜 깬 고요한 마을의 풍경이었다. 간혹 집 바로 옆에 있는 관사 전속의 정구장에서 팡-팡- 리드미컬한 연식 소프트볼 소리가 들려올 뿐,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아침이었다.
나는 인천중학교 정구부(庭球部) 일행 6명과 함께, 월요일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되는 전국 중학교 정구시합을 대비해 전날 토요일 인천에서 상경, 우리 집에서 기식하면서 하루 연습을 할 계획이었다. 같이 조반을 들고 아침 10시 정구장으로 나와 시합을 대비한 난타와 「발레」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11시쯤 되었을까, 평소 나와 자주 정구 연습을 했던 동국대학교 재학생인 조 씨가 나타나더니, “지금 38선이 터져 난리가 났는데 무슨 한가하게 정구를 치고 있어!” 하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쫓아 들어와 라디오를 켰다. 조 선배의 이야기가 맞았다. 대회가 될 리 없었다. 인천 정구부 일행에게 알리고, 재빨리 해산을 결정했다. 나를 제외한 일행은 각자 인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큰길까지 친구들을 배웅하면서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군용 짚차가 확성기를 달고 다니면서 “주말 외출 장병은 속히 소속부대로 복귀하기 바란다”, “긴급하게 알린다, 각자 자기 부대로 속히 돌아가기 바란다.” 라는 요지의 가두방송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사이렌을 울리며 헌병 차들이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동안 간혹 38선에서 피아(彼我)의 교전(交戰)이 있었으나 대부분 단막으로 끝났으며,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공을 세운 「육탄 3용사」 의 이야기가 장안의 화제거리 정도였다. 이렇게 야단법석이 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군대가 공연히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닌가라고 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크게 터졌구나, 하는 것은 집에 돌아와서 확인되었다. 직장일로 새벽에 외출하셨던 아버님이 돌아오셔서, 일체 외출하지 말고 집에만 모여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간단한 전황을 설명하시며 인민군이 어마어마하게 큰 전차들을 앞세우고 공격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곧이어 Ellen이 전화를 해왔는데, 자기 가족은 일본으로 소개(疏開) 될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나에 대하여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조한 밤이 지나고 26일 새벽녘에 Ellen이 다시 전화를 걸면서 “Jin Hugh, I'm leaving, Take care.” 울먹이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것이 Ellen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서울 점령 후 인민군은 계속 남하를 재촉했다. 집에 있는 단파라디오를 통해 전황(戰況)을 계속 들었다. 주일미군(駐日美軍) 이 참전했고 UN안보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했으며 6월말부터는 서울 상공에 YAK기가, 그리고 간혹 미군(美軍) 전투기, 함재기(艦載機)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면전이 한반도에 상륙한 것이다.
인민군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주민들(특히 용산역, 서울역 근처에 거주하는)을 동원하여 군수물자를 남으로 보내는 일을 추진하고 공습으로 파괴된 한강철교를 복구하는 노력에 집중했다. 그러고 불과 며칠 만에 동(洞)인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각 가정에서 한 명씩 차출하여 용산역 구내에 집결시키고 밤중에 쌀가마니, 휘발유 드럼통, 철도침목 등을 한강변으로 운반하는 일을 시켰다.
한강 인도교가 끊기자 인민군 전차(戰車)를 도강(渡江)시키는데 기차 철교를 이용했다. 침목 사이사이에 모래가마니를 차곡차곡 깔고 그 위에 전차를 진행시켜 노량진역을 지나 시흥, 수원, 오산을 거쳐 내려갔다는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 점령 후 불과 3일 만에 한강 도하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처음 동원명령이 내렸을 때는 우리 집의 대들보이자 남자학생인 나를 내보내면 혹시 나한테 위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어머니가 가사도우미 숙자를 내 대신 내보냈다. 약 이틀정도 동원(動員)에 갔다 온 숙자가 보기에 대단히 안쓰러웠다. 그래서 내가 숙자 대신 자원해서 출동했던 이튿날 새벽, 일을 마치고 해산 귀가할 무렵이다. 동원증(動員證)을 나누어 주던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동원증 몇 장을 나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학생, 위험해. 앞으론 나오지 말아.” 하는 것이었다.
오산전투에서 일개 대대병력의 첫 파견 미군부대를 무참히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대전까지 내려가면서 서울의 공기는 인민군의 완전 승전 무드였다. 한 떼의 미군포로가 인민군 경비 하에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앞을 지나 광화문 쪽으로 행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전황(戰況)이 다소 정돈되면서 나들이가 비교적 쉬워졌으며, 이제는 일곱 식구의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해 졌다. 집에 비축해 둔 식량이 바닥이 난 것이다. 일곱 식구가 먹어 치우니 그 양(量)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식량비축을 못 했던 큰 이유 중에는 대상(大商)이었던 우리 백부님의 약속도 한 몫 했다. 시골에서 많은 양곡이 도착하게 되어 있으니 사지 말고 기다리라는 분부가 있었던 모양이다. 6월 26일 서울역 화물터미널에서 찾기로 되어 있던 양곡을 비롯한 등겨, 장작 등의 물자가 도착은 되었으나 모두 군(軍)당국에 의해 압수, 징발되고 말았다.
전남 순천에서 추진된 양곡만 해도 세 칸의 화물차에 가득 실어 놓았는데 한 톨도 건지지 못한 것이다. 이제 식구들의 일상을 보급하는 일이 나에게 부과된 제일 큰 임무였다. 다행히 아버님이 아끼시던 좋은 일제자전거가 한 대 있었다. 이걸로 수송수단은 되었고, 약간의 남한 화폐와 옷가지, 천, 신발, 담요들을 물물교환 하는 방법으로 준비했다.
이제 보급투쟁이 나에게 부과된 제일 큰 임무였다. 7月初 어느 화창한 날, 일부의 물품과 쌀자루를 싣고 자전거를 타고 서대문(西大門) 네거리 쪽으로 행했다. 한강인도교는 끊긴 뒤이고 철도철교 쪽도 미군비행기의 계속된 폭격으로 위험한 지역이었으므로 가급적 그쪽을 피해 마포(麻浦)나루 쪽으로 달렸다.
강가에 도달해 나지막하게 뜬 미군 전투기들이 한강인도교 그리고 철교를 공격하고 마포나루에서 치솟아 오르는 광경을 처음 목격했다. 지금까지 프로펠러 전투기만 봐 왔던 나로서 「제트機」 는 처음이었다. 쌕쌕거리며 날아오르는 신무기는 장관이었다. F-84인데 한국전에 처음 투입된 비행기고 뒤에 무조건 그 비행기만 보면 「호주기」라고 우리들은 불렀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 부인이 호주출신(Austria를 Australia로 착각)이어서 호주에서 제일 먼저 신무기를 한국전선(韓國戰線)에 투입(投入)한 것으로 오해를 했다.
마포나루에는 많은 도강(渡江)하는 나룻배가 다니고 있었으며 뱃삯 몇 푼을 주면 자전거, 사람을 제한 없이 날라다 주었다. 강을 건너자 여의도(일제 때부터 비행장이 있었음) 모래사장을 지나 영등포역으로 해서 오늘은 행선지를 나의 중학교 친구 조경환(병원장 역임) 군이 사는 오류동으로 정했다.
우선 경환 군의 평소 사상을 챙기지 아니할 수 없었다. 부산의 경남중학교(慶南中學校)에 다니다 아버님이 일시 인천우체국장으로 전근을 가시는 바람에 인천중(仁川中)에 전학 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님이 곧이어 서울 체신부로 또 전근을 가시는 관계로 인천에서 잠시 하숙을 하다가 서울에서 직접 통학을 하게 되었다. 조 군하고는 같이 통학을 하면서 직접 많은 대화를 하고 별 사상적인 고배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