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위험하니 앞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일곱 식구의 식량이 바닥이 나는데 집에만 엎드려 있을 수 없었다. 며칠 후 길을 떠났다. 그날 서대문 로타리에 이르렀을 때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인민재판이다. 남반부 악질 경찰관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삼베옷 허름한 차림의 그 경관은 벌써 넋이 나갔다. 죄상을 고하라고 윽박지르는데 대답이 없다. 작대기를 든 붉은 완장을 두른 두 사람과 카빈총을 멘 한 사람이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죄상이라고 논고를 하는데 여기저기에서 “옳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안타까운 것은 주변에 있었던 초등학교 아이들 몇몇이 “옳소” 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한심했다. 그 아이들이 무엇을 알까.
드디어 집행의 시간이 왔다. 사형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워놓은 로타리 위에서 하는 것이다. 약 2미터의 거리를 두고 카빈을 거총하여 머리에 조준하더니 그대로 발사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가. 그 적개심, 분노, 온 천지가 미쳐버린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구절, 「Tomorrow is another day」 구절을 생각하면서 마포나루 쪽으로 재촉했다.
양식 조달을 하러 주로 오류동, 소사, 부평, 김포, 수원, 오산 등지에다 가끔 남한산성 근방까지 진출했다. 북쪽으로는 미아리고개와 무악재를 넘어가 본 일이 없었다. 무악재 넘어 문산, 금촌 등 곡창지대가 있고, 미아리 넘어 창동, 의정부, 포천 등 만만치 않은 농사 지대인데도 전혀 발길이 가지 아니했다. 아마도 북쪽이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섭고 불안했던 모양이다.
7월 한 달과 8월 초까지 열심히 자전거로 시골길을 누비면서 보급조달에 전념한 덕에 집에 있던 큰 장독대 두 개에 밀, 보리를 가득 채웠다. 개떡과 밀기울 죽으로 끼니를 잇더라도 2, 3개월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된 것이다. 내가 가지고 다니던 물품, 옷가지, 천, 고무신, 담요 그리고 전해내려 오던 은수저 등은 귀한 물물교환의 재원이 되었다.
이만한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렀다. 일진이 좋아 많은 식량을 얻어 운반할 때는 많이도 넘어졌다. 40~50kg의 무게일 때 넘어진 자전거와 짐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고 주변 행인들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었다. 언덕을 오를 때, 땡볕 아래 숨 막히던 가지가지 어려운 광경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참외, 오이 하나씩을 점심 대용으로 하면서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 무릎, 정강이는 항상 멍이 들어 시퍼렇게 부어 있었다.
식량의 어려움을 겪던 그 시절인지라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돈암동에 사시는 백부님께서 식구 많은 동생 집이 걱정이 되어 어느 날 점심 때 우리 집에 들르셨다. 밀기울로 적당히 뭉쳐 만든 밀떡(일명 개떡)이 우리 점심이었다. 어머님이 쟁반에 두 개를 담아 백부님이 걸터앉은 부엌마루 쪽에 내놓았더니 그것을 손으로 뜯어 한 입 한 입 드시다 접시를 다 비우시는 것이다. 천석꾼 맏이로 평생 호의호식하신 당신이 농업, 상업을 통해 이룬 부(富)를 아낌없이 투입하여 동생 일곱과 당신의 장남을 일본 유학을 보내신 분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롭고 마음에 걸렸는지 백부님이 자리를 뜨시자, 어머님 눈에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8월에 접어들면서 공습은 점점 심해지고 서울 상공에는 매일 함재기(艦載機), 그리고 폭격기가 나타나 한강교, 용산, 서울역을 폭격했고, 특히 남산 근처에 자리 잡은 인민군 대공포대를 공격했다. 전투기가 나타나면 대공포는 물론, 인민군 병사들은 소총(아시바 혹은 따꿍총이라 했다)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하늘로 향해 일제히 사격하는 것이다. 철저한 대응사격 교육이 되어 있었다.
바로 이웃에 체신부장관 관사가 있었고, 일정(日政)때 만들어진 꽤 큰 규모의 방공호가 있었는데 아마도 인민군의 중요한 지휘소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주변에 군인들의 내왕이 빈번했고 우리 집 응접실에 있던 소파와 의자, 책상을 징발해 가기도 했다.
우리 집에는 미국제 단파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제니스」사 제품으로 성능이 대단히 좋아 UN사령부 보도나 일본방송을 수시로 청취했으므로 전황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이웃에 사는 체신부차관의 비서관이었던 구(具)선생은 매일 새벽에 와서 나에게서 낙동강 전투의 상황 등을 듣고 돌아가곤 했다. 구(具) 비서와는 매일 새벽 참모회의처럼 서로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어른이 자리를 뜨면 적막한 지하생활이 다시 되풀이 되는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문학전집을 갖다 놓고 읽어도 도대체 뜻이 연결되지 않고 금방 멍해진다. 불안 초조하면 글 따위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런 나의 심리상태를 구(具) 선생에게 호소하니 “그러면 담배를 한번 해 보게.” 한다. 다음날 미제 쿨(cool)이라는 연한 담배 한 보루를 가져오셨다. 어디서 구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빼서 한 대 물려주며 불을 대준다. 흡입을 하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의외로 거부감이 없이 잘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버님이 담배를 무척 좋아하셨다. 부전자전인 모양이다. 기관차 화통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50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담배를 피워오다, 최근 5, 6년 전 금연에 성공할 때까지, 담배 골초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전선에서 미군과 함께 있다 보니 질 좋은 양담배를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일선의 생활이란 다음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 초조한 나날인지라 극기(克己)보다는 말초적 본능에 더 충실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