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진회(改進會) (129회)
  제17장 은혜와 봉사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겠다는 의욕에 불타던 20대 중반 나는 개진회(改進會)라는 의숙(義塾)에 참여하게 된다. 출신학교, 출신지역을 훌쩍 뛰어넘어 엄선된 엘리트의 이 모임이 탄생하게 된다.

지난 50여년의 사회생활을 통해 이 모임의 강령과 취지는 항상 나의 방향잡이가 되었다. 그리고 어려울 때 회원을 찾아 적절한 조언을 구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삼삼오오 개별적이라도 소모임을 통해 그 끈끈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개진회에 관한 이야기는 3대 회장인 덕송 조용연(德松 趙龍衍) 씨의 회고록 「값진 삶」에서 전재하고자 한다. 존경하는 고인(故人)은 생전에 옮겨 실을 것을 부탁 받고, 쾌히 승낙해 주셨다.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개진회(改進會)모임으로 젊은이의 열정을 풀려하다

1959년 갓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만섭(李萬燮)씨, 윤형섭(尹亨燮)씨, 김순겸(金淳謙)씨, 김진휴(金秦休)씨, 김준호(金濬浩)씨, 조덕행(趙德行)씨, 나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뜻이 있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4.19혁명 이후 제 2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시달렸던 이승만 정권에의 실망이 회복되리라는 바람이 깨지자, 그 당시 사회는 뒤숭숭했다. 1960년 11월 6일 동지 몇몇이 광화문 ‘보래로’ 다방에서 혼탁한 사회를 바로잡고, 이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하여 각자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국가지도이념의 최대공약수를 발견하고, 실천하려는 모체구성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1월 13일부터 무려 7차에 걸쳐 잇따른 발기인 회합에서 선언강령 및 회칙 안이 확정되었고 다음해 3월 1일에 창립총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1월 29일에는 발기인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창립대회의 준비에 착수했다. 2월 16, 26일 준비위원회에서 제출한 회칙 안을 심의하여 최종적인 보정을 가하고 뜻 깊은 1961년 3월 1일 오후 3시 종로구 협성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초대회장에 이만섭 씨를 선출하고, 임기 1년씩 책임지게 함으로써 기성 정치가들의 장기집권 야욕을 단절시키고 싶은 젊은이들의 강렬한 소망을 표시하였다. 

초대회장 이만섭(李萬燮), 2대회장 윤형섭(尹亨燮), 3대회장 조용연(趙龍衍), 4대회장 김진휴(金秦休), 5대회장 김 각(金 珏), 6대회장 김준호(金濬浩) 

헌법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질서있게 굴러가야 할텐데 사회의 구조와 움직임이 너무도 혼탁하니 이를 바로 잡자는 큰 포부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진회 회가(會歌)도 회원들이 직접 만들었다. 작사, 작곡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마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애국자, 우국지사들이 그러했듯이 ‘조국애’를 부르짖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특히 장시간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던 것은 개진회라는 모임의 이름이었다.

다수 회원들이 조국은 크게 개혁하고 진보해야 할 입장이니 개진회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름 때문에 일주일 간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회원의 뜻에 맡기자고 투표에 회부했다. 팽팽히 맞섰던 양측의 주장이 단 1표차로 개진회로 확정됐다.

매월 일정한 날, 일정한 시각에 자동으로 집합하여 되풀이 선서도 하도 애국가도 부르며 사회개혁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우리가 할 것인가를 토의하곤 했다. 이는 이념적인 고양과 방향제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세계에 뛰어들어 우리의 힘을 국가발전에 쏟겠다는 숭고한 이상의 발현인 것이다. 

회장의 임기도 장기집권은 못하게 1년으로 못 박았다. 초대 이만섭 씨를 필두로 1년씩 교체되었다. 그 당시 장기집권을 위해서 위헌행동을 서슴지 않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우회적으로 반항하는 의미도 있었다.

계간(季刊)으로 ‘개진’이라는 인쇄물도 발행되고 수시로 일어나는 국사에 대해서 맘껏 토론하고 주장하며 자기 뜻을 펴기도 하였다. 이같이 젊은이들이 활발히 뜻을 펴고 있는데 사고가 일어났다. 이호정 조직부장이 개인사정으로 당국에 의해 끌려가서 곤욕을 치렀다. 이를 계기로 우리 개진회 활동도 당국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70년(제5대 김각 회장), 개진회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회원 간의 우정은 그 후 사십년 가까이 이어오면서 이만섭 회원이 국회 8선의원으로 국회의장에 취임한다든가, 윤형섭 회원이 교육부장관에 보임되고, 대학 총장에 취임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으나 개진회의 재건에 신경 쓸 겨를이 부족해지자, 개진회는 아쉽게도 모임이 점차로 흐려졌다.

이제는 개진회 회원들도 벌써 칠순이 넘고, 손자 손녀의 커가는 것을 보면서 노년을 지낼 때이다. 그러나 아직도 젊었을 때의 그 기백은 상존하고 있다. 모두들 말년을 행복하게, 평안이 보내기를 기원한다.

진로방향이 뚜렷한 개진회 강령과 1964년 10월 10일에 발행된 「개진」 창간호에 실린 초대회장 이만섭 씨의 권두언과 2대 회장 윤형섭씨의 창간사를 전재함으로써 개진회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암시해 보려한다.
 
-강령-
ㅡ. 우리는 개인의 내적 충실을 기하며 회원 상호간의 유대를 공고히 함으 로써 지도이념에 투철하고 공동 노작에 헌신하는 통일체가 된다.

ㅡ. 우리는 깊은 학문적 고구와 상호토의 비판을 통하여 정론을 확립하고 이를 공표함으로써 건전한 여론형성과 정책수립에 기여한다.

ㅡ. 우리는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복지 사회와 평화로운 세 계를 이룩하기 위한 민주전선에 힘차게 참여한다.

-권두언-
절망의 한숨이 희망의 서광으로 인하여 사라지리라고 믿었던 것은 끝내 우리들의 백일몽이 되고 말았다. 아, 요사스런 먹구름은 종래 이 강산을 뒤덮어 짓누르고 떠날 줄을 모르는구나. 4.19에 걸었던 희망도 5 .16에 걸었던 기대도 그리고 제3공화국에 걸었던 염원도 한갓 무지개의 환각이었을 뿐 우리는 밑도 끝도 없이 오히려 눈사람처럼 점점 가중되어가는 악의 순환에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책임은 일부에게도 있고 전부에게도 있다. 동시에 책임은 주관적 상황에도 있고 객관적 여건에도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의 가장 큰 몫은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소수가 져야 할 것이다. 알만한 양식의 인사들이 제가끔 자기는 그 ‘책임져야 할 일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우려 남만을 그 안에 끌어넣으려는 추태-이것이 바로 한국적 비극의 발단인 것이다. 왜 사회의 선량 급에 들지 않는다고 치부하면 분격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데는 그다지도 인색한가?

첫째로는 위정자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겠지만 그에 뒤이어 모든 지성인 예술가, 학자, 교육가, 언론인, 학생도 또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떳떳이 각자의 책임을 지고 각자의 소임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일할 때 이 나라는 질서와 평화 속에 안녕과 평화를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창간사-
지구는 자전한다. 괘도의 이탈도 없거니와 회전속도의 완급도 없다. 지구자체의 아무런 의지와 노력도 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지표면에 자리 잡은 인간사회는 그와 판이하다. 구성원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전진과 답보와 후퇴 중 그 어느 하나가 주어지기도 하며, 자주와 예속 그 어느 하나가 운명지어 지기도 한다.

즉, 궤도의 이탈이 있고 발전의 완급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어디로 진전하며 어떻게 결실할 것인가는 오직 우리 구성원 전체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 이 점을 절감한 청년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지성과 양식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향도적 임무를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가도 체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진회를 분만하였고 그것을 통해서 조국의 웅비와 보람찬 내일을 잉태하려 하고 있다.

개진회는 결코 조국의 답보와 후퇴를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하게 우리를 위압코자 하는 전통세력의 위압과 복고적인 향수를 거부한다. 오직 개혁과 진보만이 우리와 함께 있을 뿐이다.

여기에 실천적 의지와 함께 행동이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행동에 앞서 알찬 이론이 있어야겠고 견고한 이념적 무장이 있어야겠다. 행동에는 사후의 중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내용도 없고 장래의 비전도 없는 행동은 자칫하면 사회의 혼미와 시대역행을 가져올 뿐이다. 그리하여 본회는 창립 이래 만 3년반 동안 묵묵히 내적충실을 기약하고 정진하여 왔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하기 위하여 온 정력을 경주하여 온 것이다.

이 작은 책자 속에는 우리의 설계와 개진의 웅지가 도사리고 있고 빛을 찾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공동 노작을 향한 우리의 사심없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때 회원들의 동정을 일별해 보기 위해서 회원명부(괄호안은 전직, 가나다순)를 싣는다.

김각(金 珏) Korea Herald 논설위원, 김건진(金建鎭) 중앙일보 미주(LA)본부장, 김여석(金麗錫) 한국이동통신 사장, 김무헌(金武憲) 한남대 교수, 김용서(金龍瑞) 이화여대 교수, 김순겸(金淳謙) 이화여대 교수, 김정후(金井厚) 강원대 법대교수, 김진휴(金秦休) 플라워뱅크 회장, 김종식(金鍾植) 세무서장, 김준호(金濬浩) 투자금융회사 회장, 김재성(金在誠) 조흥은행 상무이사, 김형태(金衡泰) 당진 군수, 김정길(金正吉) 배화여대 학장, 남홍우(南洪祐) 대사(大使), 문철한(文哲漢) 강원대 교수, 배재연(裵在演) 대구대 교수, 손영태(孫永泰) 재미(在美), 신인식(辛仁植) 상은리스Co. 대표이사, 신정용(申禎容) 통기성필림 대표, 신정하(辛晸夏) 재미(在美) 목사, 심상면(沈相冕) 증권거래소 이사장, 안준영(安準榮) 대림대학 교수, 윤형섭(尹亨燮) 교육부 장관, 이규행(李圭行) 재중국(在中國),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 이영기(李令基) 일본삼광기선기관장, 이인원(李寅源) 문화일보 부사장, 이인표(李仁杓) 외교관, 이호정(李浩呈) 목사, 정광희(鄭洸熙) 변호사, 정인영(鄭仁永) 공인회계사, 전석린(田錫麟) 경찰대학 교수부장, 조덕행(趙德行) 농어촌진흥공사 기획이사, 조용연(趙龍衍) 조흥은행 수석상무이사, 주성규(朱聖奎) 농림부차관, 천홍진(千弘振) 남덕연구원장, 최남규(崔南圭) 재미(在美), 최석윤(崔錫潤) 신항개발공사 사장, 한정일(韓貞一) 건국대대학원 원장, 황규진(黃圭鎭) 부산해운항만청장, 강원모(姜元模) 산업은행, 작고 <이상 41명>

회원들의 건안과 평안한 노후생활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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