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부의 사업활동 (151회)
  제19장 나의 집안과 외가

주물공장은 의외로 공장이 잘 가동되고 3~4년 만에 빌린 돈을 대부분 갚을 수 있었다. 빚 갚는 과정에서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호성(鎬晟) 외삼촌의 증언이다. 

호성(鎬晟) 외삼촌이 뒤늦게 일본 중앙대에 입학, 겨울방학에 귀국했는데 서운(棲雲)께서 두툼한 가방에 현금을 넣어 광양읍 우(宇)부자 댁에 가서 빚을 갚고 오라 했단다. 학생복에 사각모자를 단정하게 쓰고 방문해서, ‘이것은 원금이고, 이것은 그동안의 이자입니다.’ 하고 돈을 내미니 우(宇) 부자가 한사코 이자를 거부해서 이자는 돌려받아 가지고 왔단다.

또 하나의 미담은 나의 백부님과의 차용금 상환에서 있었다. 원금과 이자를 가지고 서운(棲雲)은 나의 백부님 현주(鉉周)를 찾아갔다. 이자 문제는 일언지하에 ‘이 사람아! 자네한테 이자 받으려고 돈 주었는가, 아니 되네!’ 한사코 거절하는 통에 도로 가져갔다. 

암만 생각해도 미안하고 사돈지간에 부담이 되어 안 되겠다 싶어 한 가지 구상을 하였다. 매제(妹弟)인 우리 아버님을 위해 돈을 더 보태서 집과 산을 비촌에다 사 놓으시고 아버님 은퇴 후에 같이 살자고 하신 것이다. 그 후 이 집과 산을 아버님 명의로 두고 있다가 반세기가 지나 수어천댐으로 인해 수몰되면서 형님 진규(秦圭)가 보상을 받은 일이 있다.

백부님과 외숙은 합심해서 지역사회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셨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인 1944~45년 철과 코크스의 조달이 막히자, 공장의 조업이 중단되었다. 밥만 먹고 노는 것은 서운(棲雲)에게 있어 죄악이다. 마침 영등포 풍림주물에서 초빙이 있어 공장장으로 입사하여 약 일 년간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인 종업원들은 서운(棲雲)의 인격에 신뢰를 갖고 잘 복종하고 협조하는데, 기술이 좀 있다 하는 중국인 몇이 아주 못되게 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참다못해 무거운 철봉을 번쩍 치켜들어 중국인 대표의 엉덩이에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 중국인은 거꾸러지고, 한동안 실신했다가 어기적거리며 기어가는데, 밖의 화장실 ‘수앙’에 이르더니 깡통으로 오물을 퍼서 마시더라는 것이다(중국 시골에서는 타박상을 입으면 똥물을 마시는 것이 민간요법이라 함). 

이 사건 후 매서운 맛을 본 중국인들은 절대 복종하고 친해졌다. 특히 논어(論語) 등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서운(棲雲)을 존경하게 되었다 한다.

이때 또 하나의 미담이 있었으니 당시 나의 백부님 원예(園藝)가 겨울 장사를 위해 상경했었다 한다. 친구가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중국식당에 서운(棲雲)을 초청했다. 두 분은 하동장에서 만나면 반드시 청요리집에서 식사를 했고 중국음식을 두 분 다 각별히 좋아했다. 

호텔 로비에서 반갑게 만나 식당으로 걸어가는데 흰 두루마기를 걸친 시골신사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어깨를 쫙 펴고 보무당당하게 걸어가는데 그 모습이 너무 대인처럼 보였다고 한다. 역시 양반의 기개가 당당했고, ‘내공’이 제대로 된 어른은 저러한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후일 나의 여섯째 삼촌 정주(廷周)가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 정주 삼촌은 일본서 막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취직 때문에 서울에서 머물러 있다가 형님 두 분의 식사 자리에 동석했다고 한다.

드디어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광복이 왔다. 

삭풍의 추위와 빈곤 그리고 불안했던 20년의 망명생활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산 넘어 멀리멀리 날아가 버린 재운(財運)도 해방과 함께 돌아왔다. 전쟁통에 구매가 불가능했던 철제품(鐵製品)의 수요가 일시에 폭발했고, 24시간 조업이 3년에 걸쳐 연속되었고, 6.25 사변 때까지 거의 이어졌다. 공급은 전남(全南) 동부 6개 군(郡)뿐만 아니라 경남 하동, 남해, 진양까지 커버했으니 부(富)의 회복은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자선과 육영사업

일제 말엽, 그렇게 식량사정이 어렵고, 그야말로 초근목피, 풀떼기죽으로 연명하는 처지에서도 고향 비촌, 평촌, 신황, 구황리에 걸쳐 해산하는 집이 있으면 어디서 구했는지 백미 한 되와 미역 한 가닥을 반드시 보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운(棲雲)은 그 어려운 시절에도 자선(慈善)의 가통(家統)을 계속 이어가려 노력했다.

이러한 은혜의 덕으로 여순반란 때 백운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던 서운(棲雲)을 알아보는 빨치산 간부가 있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일도 있다. 호황을 맞은 서운은 이 재산을 어떻게 유익하게 쓸까 구상하게 된다.

첫 번째 한 것이 진상면 각 리, 동 주민들의 협동을 위해 동청, 또는 당산 느티나무에 매달아 놓고 통신할 수 있도록 무쇠 종(鐘)을 제작 공급한 것이다. 진상면이 일시에 개화가 된 것이다. 동민회의 소집, 화재, 홍수의 경보 등 방송장비가 공급될 때까지 그 역할을 이들 종(鐘)이 다 했다. 

두 번째는 육영사업이다. 군지(郡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서운(棲雲)은 후세의 대한 교육의 열의가 지대하여 이곳 진상, 옥곡, 진월, 다압, 골약 일대의 청소년 교육기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사재(私財) 논 200두락을 희사, 학교 설립의 기반을 조성하자, 김철주(金鐵周, 논 50두락), 서학문(徐學文, 50두락), 김현주(金鉉周)가 100두락을 희사, 이를 기금으로 학교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공사를 착공했으나 당시 목재운반 도로가 없어 애로가 크자, 서운(棲雲)은 어치마을에서 비촌까지 6km의 도로를 개설하여 백운산에서 자재를 운반하기까지 하였다. 경비 조달이 어려워지자 서운(棲雲)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전원 동원하여 얻어지는 수입을 전액 투자하고, 진상면민의 노력동원을 지원 받아 어렵게 어렵게 2년 만에 8개의 반듯한 교사를 준공, 1948년 10월 15일에 입사하게 되었다. ...’

그동안 여기저기 산개해서 수업을 받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고대하던 교사(校舍)가 마련되자, 주민들과 합세하여 진상면이 생기고 처음인 큰 축제를 열었다. 광양읍보다 2년 먼저 졸업생을 배출한 진상중학교와 진상종합고등학교는 고장의 유능한 인재를 육성, 이들은 현재 사회 각계각층에서 그들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군지(郡誌)는 이어 간다.

‘...이 땅의 교육발전에 남다른 열의와 관심을 갖고 교육의 횃불을 들었던 서운(棲雲)은 83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지금 진상면 비촌에 안장되어 있는 그는 후세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으며, 그의 신념인 「先 人間 後 知識」(선 인간 후 지식)은 지금 진상교(津上校)의 교훈이 되고 있다. 진상이 낳은 교육계의 선각자요 사업가이며, 인성교육의 선창자인 서운(棲雲)은 우리 가슴에 향기어린 모습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

진상중학교는 군내에 유일한 사립학교로 출범했다가 3년 후 국가에 기부하여 공립학교가 되었고, 1966년 동민과 주민들이 어울려 서운(棲雲)의 공을 기리는 송덕비를 학교에 건립하게 되었다. 
 
비문

조계산 한 가닥이 백운산으로 뻗어 내린 아래 2천년 오랜 전통을 지녀온 역사 깊은 고을이 있었으니 광양군이요, 순자강 줄기가 섬진강으로 흘러내린 서쪽 언덕에 기름진 터전을 이루니 여기가 바로 광양 고을의 진상면이다. 
 
산 좋고 물 맑은 고을이라 내가 일찍 일제의 압정을 피해 숨어 거할 곳을 찾는 데가 여기요, 방랑하던 것도 거기요, 그러나 마침내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만난 곳도 거기라, 광양은 언제나 잊지 못하는 곳이려니 그런 인연으로 그곳 청년들이 서울로 나를 찾아와 진상중학교의 피땀어린 연혁을 비에 새기고자 청하는데 특히 그 설립자가 棲雲 黃鎬一(서운 황호일)이란 말에 다시금 옛 기억을 되새겨 자못 깊은 감회에 잠길 수 밖에 없다.

그는 젊을 적 적수공권으로 주물공장을 경영하며 깨끗한 재산을 모았으나 일제시대에 민족울분을 참지 못하고 백운산에 들어가 엎드려 지냈는데, 나 또한 숨어 다니던 때라 그 산에서 만나 회포를 푼 일이 있던 분이다.

해방된 뒤 서희수 님 등 유지들이 그를 찾아 중학교 설립문제를 건의하자 그는 유쾌히 논 2백 두락을 희사하였고, 지방유지 김현주님도 백 두락을 기부하고, 김철주 님으로부터 일천여 평 기지를 기부 받아 공사를 진행하면서 1948년 10월 15일 진상면 회의실을 빌려 개교하고, 이듬해 1월 22일 신축교사로 옮겼으나 체제를 갖추기에는 너무 부족하여 그는 몸소 나서 심혈을 기울였고, 면민들도 집집이 4십여 일씩 땅을 흘려 마침내 그 준공을 보는 동시에 1950년 5월 20일 진상중학교의 인가를 얻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었으랴.

더욱이 그동안에 이천여 명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가 모두들 크게 쓰이니 과연 나무를 심어 열매를 거둠과 같다. 인재를 기르는 거룩한 학원과 설립한 공로자들과 땀 흘린 면민들에게 세세대대 큰 축복이 있으리라.

1966년 12월

이은상 글, 김기승 글씨, 동창생 일동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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