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父母)님 (154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아버님은 1909년 1월 25일 지랑(旨郞) 마을에서 2남으로 태어나셨다. 새 집으로 이사한 후의 득남이라 할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셨단다. 

관(官)의 횡포에 많이도 당했던 조부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식 교육에 노출시켜 관인(官人)으로 키우는 것이 소망이었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첫 수혜자는 당연 우리 아버님일 수밖에 없었다. 공부도 잘 해 주었지마는 가정의 뒷받침이 철저했다.

서당을 거쳐 기성(期成) 단계에서부터 우리집안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면내(面內) 첫 4년제 소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광양읍내의 소학교에 진학했다. 광양소학교 동기들은 모두 쟁쟁했다. 민주당 신파(新派)의 거물이었던 엄상섭(嚴祥燮) 의원, 같은 당(黨)에서 민주당 정권 때 법무장관을 지낸 조재천(曺在天) 선생, 우리 교육계의 큰 스승이었던 장준화(張俊華)선생 등 쟁쟁한 면모들이었다.

아버님 소학교 졸업시험 때 수학 문제 하나를 푸는 과정에서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경성고보에 원서를 제출해 놓고 있었던 터라 담임선생님(朴선생님으로 알고 있음)이 매우 불안해했다. 다른 동급생은 모두 보내 놓고 박 선생님이 아버님을 붙들고 처음부터 상세하게 설명했고, 유사한 문제를 내서 풀어보게 해 그 문제만은 통달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 생각하면 6학년 산수 문제에서 제일 어렵고 헛갈리는 문제로서, <학과 거북이(쓰루도가메)> 문제인 것 같다. 푸는 방법을 완전히 터득한 아버님은 천운이었든지 바로 그 문제가 출제되어 산수는 100점 만점에 가까웠다고 한다. 합격에 다소 자신은 있었지만 언어, 상식 등 다른 과목이 있고, 내노라하는 전국의 수재가 집합하는 곳이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2차인 중앙고보에 원서를 내고, 아침 소집에 응하고 중앙 교정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흰 두루마기에 벌렁벌렁 춤을 추며 접근하고 있는 나의 큰 아버지 현주(鉉周)님을 보고, 저 분이 좀 실성을 했나 생각하는 찰나, “선주야! 이리 나오느라 마, 합격한기라!” 고함소리에 한동안 멍했다 한다. 옆에 같이 섰던 조재천(曺在天) 씨는 망연자실했다.

조(曺) 선생은 낙방을 했고, 중앙중학에 일 년을 다니다 학비 때문에 다시 시험을 쳐서 대구사범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엄(嚴) 의원은 처음부터 광주사범 특과에 입학하였고, 후에 조(曺) 장관과 함께 교유(敎諭)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 후 뜻을 세워 일제 때 사법고시(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둘 다 법조인이 되었다.

아버님의 경성고보(지금의 경기고등) 합격은 우리 집안의 큰 경사였고, 주변의 주의를 끌어오는데 충분했다. 합격 후 인사동의 김태석(金泰錫) 선생 댁에 하숙을 정했다. 삼촌들이 하나둘 상경함에 따라 인사동 하숙은 우리 집안의 한양 거점이 되어갔다.

1920년 당시는 지금과 달라 조혼(早婚)의 경향이 있었다. 여식(女息)은 15세 정도가 되면 정혼(定婚) 문제가 시작되면서 신부의 모친이 혼수를 하나둘 준비하기 시작한다. 남자측도 여기에 질세라 17, 18세가 되면 혼사 문제를 집안에서 거론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여자가 한두 살 위의 나이를 선호했다. 민며느리로서 노동력 때문이라고 했다.

부친은 고보 3년 때부터 규수를 물색해 왔는데, 백부님 원예(園藝)는 내심 동생의 짝이 될 규수를 마음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누이동생을 마음에 둔지가 꽤 오래 되었다 한다. 다만 문제는 만주 북간도에 가 있는 것이 문제였다. 백부님이 어느 날 나의 외숙이 되실 서운(棲雲)에게 넌지시 운을 떼었더니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 아버님 / 경성초.고보 졸업반 때(이때 어머님과 결혼하셨다)

그러나 5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비촌 황(黃)씨와의 혼사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신랑 신부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절차가 대단히 복잡했다. 지랑 김(金)씨 측에서는 조부, 백부 그리고 당사자인 부친이 OK하면 간단하지만 황(黃)씨 쪽은 동편(東便)과 서편(西便)이라는 양대 산맥이 있어, 혼사 문제는 일단 원로회의에서 비준이 되어야 하는 집안의 대사(大事)였던 것이다. 

지랑 김(金)씨는 신흥 벼락부자에, 내세울만한 족보가 못되었다. 국내 최고 중등교육기관에 다니는 영재라는 점, 돈이 좀 있다는 점 정도가 대응 요건이었다. 그런데 진월면 대리(大里)의 전통이 있는 집안인 송(宋)씨 가문에서 비촌 황(黃)씨와의 혼담이 진행 중이었다.

우선 원예(園藝)와 서운(棲雲)은 작전을 세웠다. 두 분이 직접 나서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나의 외조모의 오빠 되시는, 당시 진상면의 면장을 하시던 허(許) 면장을 중매로 내세우기로 했다. 허(許) 면장은 <느제> 동네에 사시면서 면(面)에 출퇴근을 할 때 아침저녁으로 비촌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원로들에게 지랑 김(金)씨의 좋은 점을 계속 이야기하고 신랑감도 좋은 재목이라는 것을 수시로 <세일즈> 를 했다. 

그런데 난공불락이었다. 원로들이 내세우는 소리가 김(金)씨에게 매우 모멸감을 주는 정도였다. 이때쯤 서운(棲雲)은 북간도에 연락해 누이동생을 고향으로 보내도록 수배를 해서, 호성(鎬晟) 외삼촌과 장차 아버님의 큰 동서가 될 전주(全州) 이(李)씨가 「에스코트」해서 일주일 만에 만주에서 비촌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잘 풀리지 않고 초조해진데다, 치졸한 소리까지 듣게 된 백부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즉 방법은 협박이었다. 

서운(棲雲)의 증언 : 하동 장(場)에서 주물 판매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원예(園藝)가 홀연히 나타났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고 해서 인근에 있는 청요리집으로 안내를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문에 둘둘 말아온 묵직한 물건을 식탁에 탕, 놓더니, “오늘 나 밥 생각 없네, 늙은 원로들이라는 게 개화되는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우리 ‘몰랑몰’ 김(金)씨를 그따위로 괄시를 해 내가 더 못 참겠네, 혼사고 머이고 없던 것으로 하고 제가 얼마나 양반인지 나의 도끼 맛을 좀 보여줘야겠네”, 하면서 다시 한 번 가져간 도끼를 들었다가 상을 내리쳤다. 

이에 놀란 서운(棲雲)은 원예(園藝)의 손을 움켜잡고 “이 사람아! 내가 독단적이라도 오늘 돌아가서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겠네, 노여움 풀고 집으로 돌아가게. 나한테 맡기고 빨리 넘어가게.” 하면서 진압에 열을 올렸다 한다.

이런 서운(棲雲)의 결단이 주효하여 약 6개월 후, 끌어왔던 혼담은 끝이 났고, 1928년 3월 봄에 드디어 혼례가 이루어졌다.

부친이 4학년 때였다.

나의 모친은 1908년 10월 23일생으로 아버님보다 한 살이 위였다. 망명생활 속에서 만주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정상교육은 접하지 못하였으나 글은 깨쳤고 소설 등 책읽기를 좋아했다. 주변 분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머님은 동정심이 강했고, 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수줍음이 많고 순종형이라 했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해 셋째를 낳고 난 다음부터 건강이 약해지면서 아이들에 관해 항상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특히 둘째인 내가 외향적이고, 좋게 말해 좀 활달해서 어머니의 통제가 필요하다 느끼셨던 모양이다.

그 시절 흔히 말하는 여필종부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와 교육 정도의 차이, 해외문물을 접한 경험 등이 큰 차이가 있어 젊은 시절은 부친의 생각과 행동이 모두 다 옳은 것으로 알고 따랐을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셨지만 내 기억에 한 번도 어머니가 부친과 다투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주변 이야기에 의하면 남편 시집을 좀 사신 것으로 전해지고, 서방님을 좀 어렵게 여겼다고 한다.

 
  외숙모 정씨와 비촌황씨 에필로그 (153회)
  유년시절(幼年時節)_1 (155회)
  |11||12||13||14||15||16||17||18||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