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幼年時節)_2 (156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첫 도시생활의 이모저모

아버님은 벼슬을 하라는 할아버지의 간곡한 당부에 의해 도(道)의 관리로 출발하셨다. 산업과(産業課)의 판임관(判任官)으로 들어가셨는데 ‘턱시도(연미복)’을 빌려 입고 도지사에게서 임명장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의 직위로 치면 주사(主事) 정도의 직급이라 하겠다. 당시 도지사(道知事)는 칙임관(勅任官)이라고 해서 황실이 임명을 하고 과장, 군수는 고등관(高等官)으로서 수상 또는 총독의 사령에 의해 임관되었다. 

보수가 좀 박했던지 시골 큰댁에서 우리 집으로, 쌀가마가 남철(南鐵) 버스편으로 가끔 도착했다. 마차 택배꾼이 쌀과 함께 집에 찾아오면 어머니는 매번 동전 몇푼을 주어 보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배달비였는지 아니면 소위 ‘팁’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곧 이어 유치원에 들어갔다. 골목 두어 개를 지나 큰 길을 건너면 교회가 있었다. 교회 옆에 빨간색 벽돌집이 유치원인데 원생 약 20명 정도였다. 선생님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우리 엄마보다 좀 더 젊은 분이었고, 손목에 찬 반짝거리는 조그마한 시계가 그렇게도 좋아보였다. 참 친절하고, 시골에 있는 우리 누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화장실은 음산했으나 수업시간이 끝나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다. 남녀 공용이었고, 소변기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있었다 하더라도 꼬마인 나에게 성인용은 맞지 아니 하였겠지, 여하튼 변소 칸에 들어서서 볼일을 보는데 그만 밖에서 문을 잠그고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꽉 잠겨 있고 발로 차도 열리지 않는다. 신입생 촌놈인 나에게 왕따가 시작된 것이다. 울고불고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고, 40~50분 후 학과가 끝난 다음 아이들이 화장실에 들어서면서 겨우 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까지 이(李) 선생님은 원생 중 하나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나를 안고 위로하느라 꽤나 수고하셨고, 죄책감이었던지 수업이 끝나자 나를 데리고 우리 집에까지 와서 어머님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내가 소학교에 진학했을 때인데 어느 날 우리 어머니가 훌쩍거리고 계셨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李) 선생님이 변두리 어디에 사시는데 장마에 집이 무너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여린 우리 엄마가 그분이 불쌍해서 우신 것 같았다.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공작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색종이로 고리 접기를 했는데 1m 정도의 길이까지 작업이 되었다.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대견하게까지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이것을 목에 걸고, 양손으로 끝을 치켜들고 집으로 향했다. 큰길을 건너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난데없이 큰놈이 하나 나타나더니 목에 건 고리 접기 작품을 왕창 잡아채더니 그걸 형편없이 망가뜨리고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일생일대에 나의 노력으로 처음 만든 이 아름다운 수공예품이 형편없이 파손되었으니 난감하고 억울하고, 어머니한테 자랑을 하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터에 그것마저 수포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기가 찰 일인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을 사정없이 흙바닥을 앞뒤로 비비며 대성통곡을 해댔다. 
 
그때 바로 앞 부잣집인 듯한 곳의 대문이 열리면서 중학생 형이 나타나 나를 대문 안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정원에 있는 수돗가에 세우고, 엉망이 된 바지와 흙범벅이 된 손등을 깨끗하게 닦아 주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수건과 풀을 가지고 나와서 수건으로는 나를 닦아 주고, 풀로는 파손된 색종이 고리를 일부 복원해 주었다. 온전하지는 못했지만 80% 정도 회복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유치원 졸업식(1937.) / 둘 째줄 네 번째

도시생활에 적응하고, 친구도 하나둘 생기면서 나도 악동(惡童)이 되어갔다. 우리 집 앞 큰길 건너 시골 어느 군수를 하신다는 당숙(堂叔) 집이 있었는데 가끔 들르면 떡, 곶감, 단팥죽, 유과 등을 주신다.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루는 친구 하나를 앞세우고 그 집에 들러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데 뛰어 가는 친구만 보고 냅다 뛰다가 설렁탕 운반하던 자전거에 치어 길가 하수도 수채에 쳐 박히고 말았다. 머리에서 피가 나고 팔과 다리에 찰과상을 입고 야단이 났다. 설렁탕 아저씨의 부축으로 집에 들어와 어머니께 인계되었다. 옷을 홀딱 벗고 몸을 씻고, 피나는 데는 약을 바르고 응급처치가 끝났다.

좀 시간이 지난 후 설렁탕 아저씨가 머큐롬 등 약 몇 가지를 들고 와서 어머니 앞에서 조아리고 서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지폐 한 장을 방에서 들고 나와 아저씨에게 전달하려 했다. 아마도 산산조각이 난 설렁탕 그릇 등 대물손해분에 대한 변상이었던 모양인데 아저씨는 한사코 거절하며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가 재빨리 대문까지 따라 나가 한사코 아저씨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피까지 흘리고 아파 죽겠는데 돈을 주어 보내는 것이 좀 이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님은 분명히 내가 옆도 안 보고 쏜살같이 돌진하다 부딪친 것으로 보고 아들의 과실에 무게를 둔 것이다.

악동의 행각은 계속되었다. 우리 무리에는 여자도 2, 3명 끼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악동대장의 안내로 이웃에 있는 빨간 벽돌집 일본여학교의 교정에 놀러갔다. 정구시합이 막 끝나고 다과회가 있었던 모양으로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 조금씩 남아 있는 맥주병까지 테이블에 즐비하게 놓여 있어, 완전히 우리들에게는 ‘노다지’의 기회가 왔다. 

과자도 주워 먹고, 어떤 악동은 맥주를 입에 댔다가 ‘퉤, 퉤’ 하며 내뱉는가 하면, 여하튼 야단스러운 악동 파티가 벌어졌다. 나도 질세라 맥주를 한 모금 먹었다. 쌉쌀한 것이 어른들이 도대체 왜 이런 것을 좋다고 마시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조금 있으니 ‘이놈들이!’ 하는 소리에 쳐다보니 어른 한 분이 쫓아온다. 혼비백산 사방으로 튀어 도망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마 학교 소사(小使)가 청소하려고 오는 모양이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어느 일요일인데 허락도 받지 않고 악동들과 함께 원거리 소풍을 나간 것이다. 마을 젊은 어른들이 금호강으로 회평(해평, 회무침)을 가는데 이 대열에 낀 것이다. 쪽대 그물에 낚싯대를 든 이 어른들은 너무 멋이 있어 보였다.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고, 내리막길을 지나 두서너 시간을 걸어갔을까, 고향에서 보던 수어천보다 더 널따란 강이 나왔다. 어른들의 신기한 수렵 작전에 감탄하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어른들이 주는 한두 개의 김밥 보시로 점을 찍고 해거름에야 겨우 귀갓길에 올랐다. 왔던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보니 저만큼에서 형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워 쫓아갔더니 집에서 야단이 났단다. 좀 어디에 피했다 나중에 들어갈까도 생각했으나 힘센 형님이 옆에 있으니 꼼짝 못하고 따라갔다. 

어둑어둑할 때 집 대문에 들어섰는데 아버지의 야단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와 믿었던 호성(鎬晟)이 외삼촌까지 야단치는데 고립무원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호성(鎬晟) 외삼촌이 오래간만에 방문한지라 아버님은 그날 매는 들지 않았다.

내가 장성해서 육군보병학교 간부후보생으로 있을 때 야밤에 비상소집이 떨어지고 금호강 다리 입구까지 왕복 구보를 하는데 그렇게 멀 수가 없었다. 여섯 살짜리가 광주 도청 근처 수정동(당시 대정정:大正町이라 불렀음)에서 금호강까지 어떻게 나들이를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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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학교(小學校) 입학 (1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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