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小學校) 입학 (157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유치원의 화려한 졸업식이 있던 무렵, 어머니 손에 이끌려 변두리의 수정심상소학교에 가서 시험 같은 테스트를 받았다. 냇가 제방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니 학교가 하나 나왔다. 줄을 서서 선생님 앞에서 하나하나 「인터뷰」를 하는데 나의 차례가 왔다. 아마도 ‘하나 둘 셋...’을 손가락을 꼽으며 세어보라는 지시였던 것으로 안다. 

시키는 대로 ‘하나 둘 셋...’ 하며, 좀 배웠던 일본말로도 ‘이치 니 산 시...’ 하면서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속도로 끝을 냈더니 선생님이 나의 손을 꼭 잡으면서, “잘 하는데 천천히 세는 거야.” 라고 하신다. 옆에 섰던 우리 엄마도 파안대소했고, 여하튼 합격의 영예를 얻고 돌아온 것 같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던 고재청(高在淸) 학생의 평소 지도가 주효했던 것 같다. 고(高) 학생은 창평(昌平) 고씨(高氏) 의 큰 어른 고재호(高在鎬) 선생의 제씨(弟氏)가 되는데 우리가 고(高) 선생의 광주 집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대신 아마도 광주서중 졸업반에 다니던 고재청(高在淸) 씨를 데리고 있도록 합의가 된 모양이었다. 
 
문간 쪽 아랫방에 있는 학생 방은 나의 단골 방문처였다. 심심하면 들르는데 셈도 가르쳐 주고 영어 ABC도 보여주고 해서 제법 유식해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소학교에 입학하자 어머니가 문밖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란도셀」에 깔끔한 교복을 걸친 나는 누나와 형에게 이끌려 학교에 따라다녔다. 백부님의 외동딸 진애(秦愛) 누님이 중학교 진학을 위해 6학년 졸업반 때 우리 집에 와 있었다.

당시 광주사범 교사(校舍)를 신축하는 중이어서 일부 사범 학생들이 수정소학교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 형아들이 우리들을 쉬는 시간마다 데리고 놀아주면서 많은 동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때 「안델센」의 이야기 등이 우리 귀에 처음 전달되었고,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치는 장면에서는 우리들이 눈물을 짜던 일도 기억이 난다.

형아들이 그렇게 훌륭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또 마음씨도 고왔다. 수도꼭지가 여나믄 개 달린 수도간이 있었는데 우리 꼬마 일학년생들에게는 너무 높아 발돋움을 해야 겨우 한 모금 얻어 마시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형아들은 우리를 번쩍 들어 올려 흘리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우리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 바로 도청 뒤쪽에 호남의 명문 서석(瑞石)소학교가 있었다. 가끔 개구쟁이들과 놀러가곤 했는데 교사(校舍)도 멋있고, 교정에 나무도 우거진, 공원 같은 그곳이 너무 좋아 보였는데 왜 나는 신설학교 황량한 수정소학교에 보내졌을까 의문을 가졌다. 

조선인으로서는 비교적 고위직인 아버지가 조금만 청탁을 했으면 서석소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 않나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버님께서는 당신 나름의 어떤 생각이 있으셨으리라 여겨진다.

여하튼 수정소학교 입학을 기념하여 학교에서 주는 「왜 감나무」 두 그루를 고향에 보내 심도록 해 내가 장성할 때까지 주먹 크기만한 탐스런 붉은 감을 가을마다 감상할 수 있었다. 당시 황폐한 산지를 조림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총독부는 입학생들에게 나무를 주어 심게 해서 책임조림을 장려했던 것 같다.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많은 「바이러스」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감기는 물론이고, 고열로 중이염을 앓고 코피가 자주 나는 생활이었다. 형은 와룡대감(臥龍大監)이라 비교적 정적이고, 한 자리에 오래 조용히 버티는 성격인데, 나는 반대로 외부에 나돌기를 좋아하고, 좋게 말해서 활동적이었다. 한 번도 형과 함께 병원 나들이를 한 기억이 없다.
 
▲ 소학교(小學校) 입학기념 / 앞줄로부터 셋째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필자이다. (1938. 봄.)

나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자주 「혜성병원」이라는 데를 따라가 진찰 받고, 주사 맞고, 약 타가지고 왔다. 제일 싫은 것은 주사 외에 진물나는 귀를 후비는 일인데, 나 죽는다고 떼를 쓴 적이 자주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무서웠으나 흰 가운과 흰 모자의 간호사는 예쁘고 친절해서 좋아했다. 치료가 좀 심했다 싶으면 간호사가 의례히 사탕 하나를 입에 물려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시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가끔 나를 데리고 설렁탕집으로 갔다. 파 냄새는 좋지 않았지만 뿌연 국물은 아주 맛이 있었다. 아마 어머니 몫까지 내가 다 먹었을 것이다. 그 시장에서 일년감(토마토)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 붉고 탐스러운 이 감은 보기보다는 맛이 덤덤하고 노린내가 나는 것이 처음에는 역했으나, 어머니는 자주 사서 반찬으로 올리곤 하셨다. 만주 생활에서 일찍이 먹어보신 음식이었나 보다. 

나는 미군과의 생활, 유학생활을 통해 토마토의 진가를 알게 되었고, 「케찹」, 「칠리 소스」 등 가공품과 생 토마토를 항상 집에 두고 상용하고 있다.

도시생활은 재미도 많았다. 나팔소리, 북소리가 요란해서 밖으로 쫓아나가 보면 악대를 앞세우고 광대가 춤을 추고, 짙은 화장의 아름다운 선녀들이 인력거를 타고 시가행진을 해댄다. 촌놈인 나에게는 황홀했다. 때에 따라서 코끼리를 앞세우고 각종 동물과 원숭이를 동반한 서커스단의 행렬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그때부터 설레며 하마나 하마나 아버지의 구경 가자는 말씀이 떨어질까 학수고대하다 영 소식이 없어 실망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서커스」를 딱 한번 관람한 적이 있다. ‘공중트래픽’은 신기했으나 동물들을 가죽채찍으로 마구 치는 것을 보고 참말로 인간이 잔인하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그 다음부터는 별로 흥이 일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아까이 란탄 호노가니 유레루’ 하는 구슬픈 일본 노래에 맞추어 막간을 이용해 ‘목을 쭉 빼는’ 가냘픈 여자의 모습은 신기하기는 했으나 억지로 잡아 빼는 목은 약 30~40cm 정도나 쭉 늘어나면서 괴물이나 유령 같아져서 그만 무서워졌다. 그 다음부터는 서커스에 별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은 밤이면 좀 무료하셨는지 나를 데리고 자주 극장에 가셨다. 영화도 가끔 관람했지만 신파 연극도 가끔 보았다. 연극은 나의 흥미를 끌만한 나이가 아니었던지 별로였다. 다만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겨울에는 ‘땅콩, 강낭콩’ 얻어먹는 재미로 자주 아버님과 동반했다.

그런데 어머니도 구경에 흥미가 있었을 터인데 한 번도 같이 가는 일이 없었다. 그때는 아마도 내외의 구분이 심했고 같이 동행한다는 것은 금기였던 모양이다. 심지어 길 건너 군수 당숙 집에 초청이 있으면 내외분이 따로따로 가셨다.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가 먼저 가시고 4~5분 있다가 어머니가 건너가시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난다.

여름의 도시생활도 재미는 있었다. 무등산 수박이라고 어마어마한 초록색 수박은 달기도 하지만 하나 터트리면 온 식구가 먹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우리 고향 농촌의 수박은 거기에 비하면 참외 크기에 불과했다.

그때에도 여름 한더위 때는 물을 가득 실은 탱크차, 즉 살수차가 운행되었다. 길을 촉촉이 적셔 주며 천천히 달리는 물차는 우리들에게 Acrobat 놀이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옆에 지키고 있다가 차가 지나가기 바쁘게 분사되는 물 위로 껑충 뛰어 물을 다리와 발에 흠뻑 맞는 것이다. 시원하고 스릴 만점이었다. 이래저래 흥미진진했던 첫 도시생활은 일 년이 지나고 있었다.
 
소학교 일 년이 끝날 무렵, 또 한 번의 이사를 가야만 했다. 광주 시내에서 가끔 「방공훈련」이 실시됐다. 그 무서운 싸이렌 소리가 온 시내를 뒤흔들고, 길에서는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1936년 6월에 시작된 중일전쟁(그때는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고 했다)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상해에서 출발, 서주(徐州)를 점령했다는 등, 일본이 전과(戰果)를 자랑하고 있을 때였다. 

도시생활의 불안을 간파한 백부님은 동생이 광주에서 가족을 데리고 사는 것이 못내 안심이 안 되었고, 도(道)의 관료라는 것도 못마땅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백부님의 재산도 만만치 않게 불어나는 마당에 옆에서 보좌하는 지성인이 필요도 했겠다. 이런 사정으로 두 분이 상의했던지, 고향으로 귀환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당시 면 소재지 우체국은 특정우편국이라고 해서, 개인이 투자하고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 고향 진상면에 섬거우편국이 대표적인 예로서, 안(安) 씨라는 어느 부호가 운영하던 곳을 백부님이 인수하여 동생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다. 

시골에 오면 가까이에 텃밭도 있어야 한다고 바로 우편국 앞 농지 열 마지기 그리고 뒷골 채소밭까지 한꺼번에 인수해서 아버님 앞으로 해 주었다. 이렇게 터전이 마련되면서 우리 가족은 일 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유년시절(幼年時節)_2 (156회)
  진상(津上)에서의 생활 (15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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