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津上)에서의 생활 (158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아버님은 나를 대담한 모험에 노출시켜 보려는 시도를 자주하셨던 모양이다. 고향으로 이사 가는 바쁜 와중에 나만을 떼어 내 「꼬리표」 하나를 양복 카라에 달아주고 기차 편으로 부산의 백부님 댁으로 탁송을 시도하셨다. 백부님 내외분은 시골 생활에서 다소 변화가 필요했는지 직계가족을 데리고 부산 초량동에 이사를 와 계셨다.

나는 아버님을 따라 도착한 광주역에서 차장에게 인계되었고, 좋은 자리에 앉아 편안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몽사몽간에 차장의 손에 이끌려 캄캄한 밤중에, 차에서 내려 건너편의 기차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대전이었던 모양이다. 경부선 부산행 야간열차였던 모양인데, 차 안은 엄청나게 만원(滿員)이었다. 자리는 고사하고 통로에 앉는 것도 힘들었다. 

문 가까이 신문지 하나 깔아주는 자리에 겨우 쪼그리고 앉자 기차는 떠났다. 잠은 오고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괴롭기 한이 없다. 난방이 잘 되어선지 점점 더워오더니 목까지 마르기 시작했다. 나를 책임진 새 차장은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갈증이 난다고 호소했더니 번쩍 들어 올리더니 화장실로 끌고 간다. 벽 쪽에 달린 꼭지를 트니 찬물이 나왔다. 어린 마음에도 변소간에 수돗물이라 좀 꺼림칙했지만 갈증 끝에 마실 수밖에 없었다. 「사이다」나 단 음료수라도 좀 주지! 혼자 생각했다.

해가 떠서 환하게 밝아오자 드디어 부산역에 도착했다. 백부님이 「홈」까지 나오시고, 개찰구를 벗어나자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던 진애(秦愛) 누님과 동생 진호(秦皓)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 제 2의 도시, 부산 구경이 시작되었다.

첫날의 시내 구경은 전차를 타고 「미나까이」(三井백화점)라는 대형 일본백화점에 들어갔다. 건물의 크기도 크기지만 부둣가에 접해 있어 옥상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는 경치는 일품이었다. 꼭대기 층 식당에서 처음 먹어보는 「오므라이스」라는 요리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음날은 또 다시 전차로 동래온천장 그리고 다음다음날은 해운대 온수풀장 등 신기한 것들의 연속 구경은 날이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고향으로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열차 편으로 마산, 진주 그리고 버스 편으로 하동을 거쳐 진상에 들어간 것 같다. 우편국 사택에는 이미 어머니와 형님, 동생들이 와 있었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의 유모인 민들에미(일명 붓들이 에미) 할매도 보였다. 이제 고향에서의 농경시대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우선 소학교에 전학을 했다. 남녀 합해서 1개 반(班)씩인데 같은 반에 외사촌 형 황기운(黃起雲)이가 있어 좋았고, 바로 아래 막내 삼촌 행주(行周)가 갓 입학했고, 바로 위에는 규주(圭周) 삼촌 그리고 3학년에는 친형인 진규(秦圭) 형이 그리고 4, 5, 6학년에는 외사촌 형과 친삼촌 그리고 사촌형들이 빼곡이 차 있어, 나에게는 아무런 「이지메」가 없이 당당하게 학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편국의 규모는 꽤 컸다. 안채는 생활하는 사택이고, 다섯 간 겹집으로 부엌, 안방, 크나큰 대청마루 그리고 작은 방과 작은 부엌, 뒤로 머슴방이 있었다. 넓은 마당을 지나 앞으로 우편국 건물이 있고, 큰 신작로 길에 면해 있었다. 우측으로 높다란 대문간 집에 양쪽으로 방이 한 칸씩 더 있었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양철지붕의 큰 창고가 있고, 중간 대문이 있는 다락채가 창고와 우편국을 연결해 주고 있었다. 뒷간도 세 개나 되었고, 뒤뜰에는 조그마한 마당과 텃밭이 있고, 닭, 돼지, 염소 그리고 말까지 키울 수 있는 헛간이 있었다. 농경(農耕)뿐만이 아니라 주거와 우편 업무까지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시설과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 1940년대 우편국 집배원들

다만 어느 유명하다는 지관, 풍수의 한 마디에 아버지는 항상 고민이셨다. 남쪽에 면해 있는 큰 대문간이 너무 높아 집 전체를 위압하고, 집안의 복이 슬슬 밖으로 새니 대문의 높이를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신을 배격하는 현대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이 주장을 거부했으나 입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은 끊이지 않았고, 전(前) 소유자 안(安) 부자가 왜 팔고 나갔느냐, 또 나의 여동생 영희(英姬)가 6개월 만에 죽고, 급기야 3년 후 어머니까지 세상을 뜨자, 버티던 아버님도 할 수 없이 대문의 높이를 줄이는데 동의하게 된다. 당시에는 이렇게 미신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많이 지배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우편국을 인수한 아버님은 우편국 청사부터 대대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내부를 거의 다 뜯어 고치고, 건물을 높이면서 새로 기와를 입혔다. 그리고 우편국 앞과 옆을 나무를 심어 조경을 대대적으로 하였고, 진주의 조경업자가 여러 가지 나무들을 트럭으로 몇 차나 실어다가 멋진 정원을 만들었다. 제주도에서 운반해 왔다는 바다 곱돌로 한반도 모형의 작은 연못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 부분을 특별히 좋아했다.

끝으로 우편국 건물은 판재로 외부를 완전히 두르고 그 위에 흰 페인트를 칠해 놓으니 신시(新市)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정기(定期) 버스도 우편국 앞에 정차해서 우편물을 내리거나 실어갔고 약 500m 앞으로 가서 정식 정류장에서 여객들을 태우고 해서, 우리 신시(新市)에서는 버스가 두 번을 정차한 셈이다. 지방신문은 매일, 중앙지는 이틀만이면 들어왔고 전화로 광양, 순천 그리고 하동, 진주까지 마음대로 연락이 되었다.

관할지역도 대단히 넓었다. 진상면, 진월면, 옥곡면, 다압면 그리고 금호, 태인의 일부까지를 담당했다. 따라서 정식 사무원과 집배원, 우편저금, 보험직원까지 합하면 15명 정도 그리고 전보접수와 전보배달까지 하면 상근(常勤) 20여 명이 가동되는 큰 우편국이었다.

국장실은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고, 바로 뒤에 사랑방 겸 침실이 큼지막하게 하나 있었고, 장작 때는 목욕탕도 붙어 있었다. 국장님을 위하여 도시생활 시설 못지 않은 「하이카라」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경찰주재소가 이웃에 있어 보안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 당시 섬거우편국(蟾居郵便局)은 근방의 젊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를 나와 봐야 어디 취직자리가 마땅한 데가 없었다. 면(面)과 금융조합이 있는데 신입직원을 매년 모집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편국은 소학교와 특약이 되어 있어 중학교로 진학하지 않는 졸업자로서 1, 2등 하는 우수한 졸업생을 소년 전보배달원으로 받아 주었다. 이들이 모두 성장해서 해방 후 일급 우체국장, 또 전화국장으로 진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나는 어릴 적 우체국 직원의 등에 업혀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가정에 필요한 각종 도구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편의를 위해 신경을 쓰셔서 준비했다. 커다란 두 말(斗)들이 돌절구(도구통이라 했음), 쌀물 가는 물매 등등 그리고 집을 지키는 강아지로 큰 거위 한 쌍을 두었는데 이 큰 거위 한 쌍은 우리 식구와 남의 식구를 귀신같이 구별하고 용서 없이 남의 식구를 내몰았다. 

주변에 대여섯 가구가 집이 이웃해 있는데, 우리집 창고 앞에 유일하게 큰 우물이 있어서 이를 공동으로 이용하도록 허락했는데 거위의 텃세로 항상 문제였다. 우편국 한 직원의 아이디어로 이웃, 주로 물 길러 오는 아주머니로 하여금 거위 내외에게 맛있는 먹이를 자주 주게 하여 평화를 유지하기도 했다.

우체국 앞 논은 집에서 직접 경작했다. 머슴을 두고, 초봄에 감자 심고, 감자 캐고 나면 바로 모 심고, 또 일부 논에는 보리도 심어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도 구경거리였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다. 

우리는 순천의 선교사들이 일본의 박해에 못 견디어 철수하면서 우리 집에 팔고 간, 젖 짜는 염소까지 키우면서 우유도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우리 집에서 소비할 수 있을 만큼의 닭도 키웠다. 가을 김장채소 등은 섬거 윗동네 뒷골 밭에서 충분히 조달되어 모든 것이 풍요롭고 안정되어 갔다.

 
  소학교(小學校) 입학 (157회)
  어머님의 별세(別世) (1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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