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승승장구와 내선일체 (164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1942년>

연초부터 국민총동원령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통제되고 전쟁목적 이외의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물자는 점점 귀해지고 배급이 시작되었다. 

나는 4학년이 되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나의 인생은 별 재미가 없는 것 같았다. 주로 밖으로 돌았고, 공부에도 별 취미가 없었다. 개구쟁이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좀 무리한 운동도 했으리라.

어느 날 열이 심하게 나더니 숨이 막힐 정도로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밤 내내 아버지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십뿌(濕布)」라는 찜질을 해 주셨다. 좀 뜨거운 수건으로 대고 있으면 숨쉬기가 편했다. 다음날 큰아버지에게 이끌려 버스로 순천도립병원이라는 데를 갔다. 컴컴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가슴의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처음 찍는 X-레이였다.

오후에 가니 의사선생님의 설명이 있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늑막염인데, 외부 충격으로 인해 늑막이 손상되었고, 어린 아이이므로 늑막에 물은 고이지 않아 수술은 필요 없다고 했다. 계속 찜질하라면서 물에다 반죽해 바르는 「이초루」라는 약과 약간의 복용 약을 주었다.

의사선생님은 일본군 군의관 출신이고 중국전선에 배치됐다가 제대했다고 하면서 가끔 군인들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늑막에 손상을 입거나, 또는 처음 전선에 배치되어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면 그 충격으로 늑막이 고장 날 수 있다고 하면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학교에 돌아가서는 4학년 일년을 청소당번은 면했고, 덩치가 큼직한 누나인 동급생이 걸레질을 할 때 등에 올라타고 ‘이랴, 이랴’ 하며 장난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여섯 살에 입학을 했기 때문에 학급에서 나이가 제일 아래였고, 막내 개구쟁이로 통했다.

또 하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군인들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를 하나씩 쓰라고 하는 과제가 떨어졌다. 노트를 펴고 적어나가는데 ‘친애하는 군인님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습니다.’ 라고 한 줄을 쓰고 나니 다음에 무엇을 쓸까 막막했다. 

이리 뒤적이고 저리 뒤적이는데 선생님이 돌아보다가 우리 반의 급장이요 천재로 알려진 장종식(張鍾植, 일본이름 나가유미:長弓)군을 교탁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쓴 위문편지를 읽으라고 했다. 한 페이지에 빼곡이 쓴 글을 읽어나가는데 우리들은 소설을 듣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나 자신의 무능에 자괴감을 느꼈다. 

그 후 선생이 없는 자습시간에는 장(張) 군이 우리들에게 일본 소설을 읽어 주곤 했다. 나는 이때부터 분발을 다짐하고, 마냥 놀고만 있을 수 없다고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린 마음은 여전히 거기에 머물기도 했다. 나는 운동화가 신고 싶은데 아버님은 언제나 촌스러운 천일(天一)표 까만 고무신만 사 주신다. 2, 3개월 신고 나면 갈라지기 시작한다. 갈라진 구멍을 더 크게 손으로 짝 찢어서 가져가 이번에는 진짜 운동화를 얻을 생각으로 보채보는데 소용이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야속하고 섭섭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조리, 짚신」을 신은 가난한 학생과의 이화감(異化感)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부(富)와 권력 과시를 철저하게 경계하는 군자(君子)의 도(道)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본다.

<1943년>

일본군은 개전(開戰)과 함께 기세 좋게 남쪽으로 내달렸다. 「필리핀」을 점령하더니 곧이어 영국의 최고 전함 「프린스 오브 웰스」호를 격침시키고, 「싱가폴」을 함락했다. 야마시타(山下) 장군이 영국군 사령관 「피시벌」을 붙들고 말했다는 ‘항복해라, YES가? NO가?’ 라는 말이 우리 사이에 대 유행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우리들에게 연식 정구(軟式 庭球)공이 하나씩 전승기념품으로 배급되었다.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까지는 대나무로 둥글게 만든 틀에 가느다란 새끼줄을 꼬아 칭칭 감아 축구공으로 쓰고, ‘오자미’라는 콩이나 팥을 넣은 조그마한 헝겊쌈지로 공놀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어 사용금지와 창씨개명, 강제징병 등을 추진하면서 “훌륭한 군대로 나가기 위해 국어(일본어)생활을 실현하자”는 내용의 포스터이다. [출처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공기가 들어간 제대로 튀는 공이란 써본 지 오래였다. 운동장이 온통 공치기 경연장이 되었고, 학년 대항, 마을 대항으로 ‘찌부’치기(손으로 치는 야구식 놀이)로 왁자지껄했다.
 
‘미∙영격멸(美英擊滅)’이라는 구호가 난무했고,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을 비하하는 각종 포스터, 만화가 나붙었다. 그리고 미, 영인(美, 英人)은 인간이 아니라 ‘귀축’(鬼畜, 귀신이나 동물) 같은 존재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쳤다. 
 
2, 3년 전에 우리들에게 꽃표를 나눠주며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던 미국선교사의 그 좋았던 이미지가 점점 사라져 갔다. 그리고 선전용 영화도 가끔 학교 운동장에서 상영되었다. 중국군이 줄줄이 손들고 항복하는 장면, 수많은 미(美),영(英)포로가 끌려가는 모습 등 그리고 극영화로는 「흑인들의 노예선」이라는 처참한 모습의, 백인이 흑인을 개 .돼지 취급하는 장면들이 포함된 영화가 상영되었다. 
 
보는 우리들은 탄식을 연발했고, 전쟁은 이겨야 한다는 다짐을 저절로 자아내게 하는 등 선전효과를 발휘했다. 영화, 활동사진이 있는 날은 면(面)의 축제날이었다. 20리, 30리 떨어진 오지에서도 열을 지어 우리 학교로 구경을 왔고, 나들이가 흔치 않았던 처녀들을 총각들이 살짝 만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행사는 일본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의 환송식이었다. 전교생이 일장기를 들고 버스정류장에 도열해 떠나는 청년을 환송했다. ‘갓데 구루소도 이사마시구(용감하게 이기고 돌아오라)’, ‘요가렌(항공전사의 노래)’, ‘온시노 다바고 이다다이데(은혜의 선물 이 담배를 피우면서)’ 등 군가들을 3,3014절까지 모두 막힘없이 불러대는 우리들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했다. 

이런 무지막지한 선전(宣傳)과 전제주의 찬양 노래를 우리들은 6 .25 인민군 점령시절에 또 한 번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 백모님과 새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동생 경자(京子)는 위기를 모면하고 암죽과 묽은 밥으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 날 큰집에서 돌잔치를 한다고 해서 갔다. 애가 얼마나 쇠약한지 일어서서 발이라도 떼어야 하는데 서지를 못한다. 너무 불쌍해 뒤돌아 앉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잘 커 준 데에는 비결이 또 하나 있었다. 선교사가 키우다가 두고 간 젖 짜는 염소를 아버님이 수소문해서 구해 오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형과 나는 번갈아 가면서 젖을 짰고, 미지근하게 데워서 동생들에게 먹였다. 그리고 풀을 뜯기는 것도 형과 나의 몫이었다. 등교하기 전에 풀밭에 끌고 나가 매어 두고, 오후에 몰고 돌아온다.

염소에게 풀을 먹일 때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염소도 좋아하는 풀이 있고, 먹지 않는 풀이 있는데, 먹지 않는 풀은 대부분 독성이 있고, 이들은 우리 몸에도 해롭다. 기근이 들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 염소가 먹는 것만 골라 먹으면 허기는 모면할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날 급한 김에 풀밭에 서있는 나무에 매놓고 학교에 달려갔는데 오후에 야단이 났다. 형이 염소를 몰러 갔는데 나무에 줄이 감겨서 거의 질식하고 있는 것을 살렸다고 하면서 나를 호되게 야단을 쳤다. 
 
염소는 사람이 지켜보지 않을 때는 나무에 매는 것이 금기이다. 한 자(尺) 정도 되는 마루목(=말뚝)을 땅에 박아 염소가 뱅뱅 돌아도 걸리지 아니하도록 주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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