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중학교(慶南中學校) 전학 (175회)
  제22장 나의 청소년기와 해방공간

군정시대라 미군 고문단(顧問團)이 체신청에 와 있었다. 그 중 선임하사관으로 「미나토」 상사라는 하와이 출신 일본인 2세가 있었는데 일본말을 곧잘 해서 아버님과 친하게 지냈다. 이분이 우리 집 현관 응접실을 임시 숙소로 쓰는 바람에 나는 영어(英語)를 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필요하니까 흥미가 생기고 흥미가 생기니까 잘 하게 되는 「체인 리액션」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나토」 상사에게 회화를 그리고 경중(慶中)의 도사(道士) 노기석 선생에게서 개인지도를 받게 되었다. 노(盧) 선생님은 우리 집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동대신동에 살고 계셔서 일주일에 3일씩 몇몇이 그룹을 지어 Reader 중심으로 공부를 했다. 

「미나토」씨와 노기석 선생의 영어 지도가 내 일생의 생활 수단이 된 것은 희한한 인연이었다. 또한 「미나토」 상사는 군용 짚차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때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었다. 이 경험이 6 .25사변 때 전방에서 거침없이 짚차를 몰고 다닐 수 있는 기초가 되기도 했다.

학교 방과 후에는 교우들과 축구, 야구 등 거침없이 뛰고 놀았다. 어릴 적 무료하면 강아지를 데리고, 또는 물새와 친구 삼아 수어촌의 강둑을 한없이 달리고 달리며 놀았던 그 강단이 기초가 되었으리라. 마냥 뛰고 뛰어도 지칠 줄 몰랐다.

3학년 때쯤으로 기억하는데 경중(慶中) 꼬마축구단을 우리 몇몇이 조직해서 발을 맞춘 다음 구포국민학교 교정에서 있었던 경남 청소년축구대회에 참가했다. 결승에 부산상업학교와 맞붙었는데 연장전에서 우리들이 승리했다. 단장은 전(前) 서울의대의 고창순(高昌舜) 박사, 「센타포드」로 「스포티」한 엄기홍 군이 리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중(慶中)은 야구가 좀 가능성이 보일 때이고, 과격한 운동인 축구 같은 것은 항상 동래중, 또는 부산상고에 밀려 한 번도 우승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축구의 우승기를 들고 보무당당하게 월요일 아침 교문을 들어서니 학교가 야단이 났다. 축구 우승기가 처음으로 교장실을 장식하게 되었다.

2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이 난다. 가을 운동회 날에 토성동 학교에서 송도까지 왕복하는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달리기에는 비교적 자신이 있었던 나는 용감하게 출전했다. 반환점까지 무사히 뛰고 돌아오는데 뉴스를 촬영하던 미군 짚차가 내 옆에 서더니 꼬마인 나를 달랑 들어 짚차에 태운다. 

그리고 속력을 내 달리다가 선두까지 완전히 제끼고 맨 앞에다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미군들이 장난기가 동했던지 엉뚱한 짓을 한 것이다. 이제 진퇴양난이다. 가자니 일등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돌아가자니 말이 안 되고, 이미 손바닥에 반환점에서 받은 스탬프 자국이 선명한데, 참 곤란하게 되었다. 

이실직고 자수하고 끝낼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마땅치 않고, 골목으로 들어가 숨어 우물우물하고 있는데 제일 선두가 지나가고, 하나 둘, 셋 넷...10여 명이 달려간 다음 골목길에서 튀어나와 마라톤 대열에 합류해서 드디어 교문을 통해 입성했다. 약 11번째 정도로 도착했는데 우리 학년에서는 단연 1등이었던 것이다. 반(班)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했더니 행운아라 하면서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경중(慶中)은 국, 영, 수 등 기본과목 외에도 음악, 「드라마」 등 예능에도 많은 비중을 두었다. 부산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이차돈의 죽음」이라는 연극을 경중(慶中)에서 무대에 올렸다. 일본 음악학교 출신이었던 오(吳) 선생님, 금(琴, 금난새 씨 아버님) 선생은 우리나라 가곡(歌曲)을 열심히 가르쳤다. ‘노를 저어가자’를 비롯해 ‘가고파’ 등 주옥같은 홍난파 선생의 노래를 해방된 우리 말로 소리 높이 부르도록 했다. 

베토벤의 합창곡, 슈벨트의 소곡(小曲)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평생의 우리 18번으로 등록해 주었다. 지금도 그 노래들은 울적해도 부르고 신이 나도 부르는 우리들의 애창곡이 되어 있다.
 
▲ 경남중학 재학 중의 사진들은 사변통에 모두 없어졌다. 1980년대 초 몇몇 친구끼리 회식모입에서 찍은 것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벌써 이 중 두 친구가 고인이 되었다. / 서울대 고창순 박사(김영삼 대통령 주치의) 그리고 아웅산에서 희생된 전 상공부장관 김동휘 군

⑦ 미(美) 군정(軍政)과 사회상

부산항은 귀환하는 해외교포 9할이 상륙하는 잔교(棧橋)의 역할을 했다. 마련 없이 돌아오는 동포가 많았고, 돌아갈 변변한 고향도 없는 이들은 얼마 있지 않아 구걸하는 거지가 되어갔다. 내가 살던 서대신동 그리고 동대신동은 비교적 생활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여기에 아침이 되면 옷도 비교적 반듯하게 입은 아이들이 구걸을 온다. 깡통만 내밀며 꿍꿍거리는데 처음에는 그들이 농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한국말을 잘 못하는 귀환동포 아이였다.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조국의 대접이 구걸로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들을 우환동포(憂患同胞)라 불렀다. 지금쯤 이들이 살아 있다면 아마도 70세 이상 노인층에 속할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고, 산업화 과정에서 생활 형편이 좀 풀렸는지 궁금하다.

통치설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미(美) 군정은 여러 분야에서 「미스테이크」를 저질렀다. 우선 한국의 주식이 쌀이라는 것조차 한참 후에야 알았다. 당분 섭취로 영양를 공급한답시고 누런 남방 설탕을 전국 방방곡곡에 배급하는가 하면 공무원들에게는 ‘A’ Ration을 지급하는 일이 벌어졌다. 

간식거리에 불과한 이 배급제도는 별 실효가 없었고, 안남미를 지급하다 보니 우리 식성에 안 맞고, 소독 때문에 냄새가 엄청 나니 좌익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만 되었다. 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이북에서는 「발전소 터빈」, 「일제기관차」 등을 징발하여 소련으로 실어갔다. 공산종주국이 먼저 복구되어 강성해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미국은 단전(斷電)이 시작되자 목포화력(木浦火力)을 계획하고, 기존 발전소를 수리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리고 전국의 교통 소통을 위해 「소리」라는 중고지만 우리에게는 긴요한 증기기관차를 원조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해방 후 원조가 필요했던 1999년까지 미국이 한국에 지원한 총액은 139억7,600$ 개발차관은 64년~89년까지 312억불이었다.

그런데 도와주는 미군에게는 쌀을 안 준다, 정치참여가 불공평하다 등 꼬투리만 잡고, 조직적인 저항만 해 나갔다. 그런데 그때 당시 남한 좌파는 이북의 소련군정(蘇聯軍政)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었다. 그 속성이 60년 후인 지금도 재현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좌익은 그 정밀한 조직을 통해 농민, 노동계, 학계를 놀라운 기교와 저돌성으로 이끌어갔다. 느슨한 우파는 판판이 당하고 언제나 당한 다음에야 정신을 좀 차리는 사후 약방격인 처신을 했다. 좌익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 경찰은 처음부터 악명 높은 집단으로 되어갔고, 일제(日帝) 때의 경찰경험이 있는 부류와 북쪽에서 쫓겨내려 온 반공산주의자(反共産主義者), 서북청년(西北靑年)들이 경찰조직에 대거 들어갔다. 따라서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데에는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가릴 것이 없었다. 오로지 공산화만 막자하는 절박한 시대, 혼돈의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곡(米穀) 공출이 다시 시작되면서 46년 봄부터 쌀이 부족해 굶어 죽는 아사자가 생기고, 울릉도에서는 학교가 한동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요 도시 특히 부산에서는 「콜레라」가 창궐해 시내 곳곳에 금(禁)줄을 친 데가 눈에 뜨였고,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남도에만 일만여 명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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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美) 군정(軍政)과 사회상 (1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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