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해방된 우리 강토는 유혈 폭동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46년 3 .1절 기념식을 우익은 보신각, 좌익은 남산에서 따로따로 치르면서 거대한 양대 물결이 정면으로 부딪쳐 유혈이 낭자한 파국이 시작되었다.
이런 파국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각개약진으로 항일투쟁을 수행하며, 각자의 이념에 충실했던 정치거두들이 그대로 광복 조국에 모여 양보 없는 격렬한 「섹트」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정치거두를 여기에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에 기반을 둔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상해의 김구, 만주에서 항일하고 소련군에 편입된 김일성, 조선의용군을 결성한 화북지역의 조선독립동맹 김두봉, 국내파로서 건준(建準)을 결성한 여운형 그리고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지하인공(地下人共)을 조직해 나가던 박헌영 등이 있었다.
이 거두(巨頭)들의 면면을 살피면 어느 누구도 대동(大同)의 조국을 화합으로 성공적인 건국을 해 보겠다는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으로 쪼개면 여섯 개로 조각이 나고, 좌우로 쪼개면 접착할 수 없는 완전한 두 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었다.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제일 먼저 당기(黨旗)를 휘두르며 45년 9월 11일 전면(前面)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엄청난 무기인 토지개혁(土地改革)과 친일(親日)의 즉시처벌을 들고 나옴으로써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각 농민조직과 전평(全評)을 재빨리 장악함으로써 해방직후 가장 강력한 정치운동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초창기 국방경비대조직에도 대거 침투하게 된다.
첫 정치적인 대결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左右)의 포격전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진공은 일군의 무장해제가 일차적인 목적이고, 1945년 2월 14일 얄타회담에서 미국, 소련, 영국은 조선(朝鮮)을 자유독립국으로 만들겠다는 원칙은 확인했으나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다. 따라서 1945.12.16 모스크바에서 삼상(三相)회의를 소집하고 조선반도를 요리하는데, 미.소(美蘇)가 첫 대결을 벌였다.
미국은 ‘1회 연장이 가능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은 ‘조선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신탁통치는 이 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미국이 소련 제안을 반대한 이유는 자치능력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소련이 점령한 이북은 소련 진입 직후부터 소련 군정을 포장 뒤에 감추고, 전면에 공산당과 조만식의 민주당이 면(面) 단위까지 인민위원회라는, 표면상으로 가장 민주적인 자치정부 형태를 착착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남쪽이 통제불능인 것을 확인한 미국은 시간이 필요했고, 인민위원회 조직에 대한 소련의 의도도 미국이 많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0여일 후인 45년 12월 27일 미ㆍ소 쌍방의 제의를 절충해 ‘미ㆍ소 공동위원회를 열어 조선 임시 민주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이것이 국내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각색이 되어 좌우 쌍방의 크나큰 갈등의 빌미가 되었다.
우파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먼저 주장했다’고 선전함으로써 좌익은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매도되는 촌극이 벌어졌고, 삼상(三相)회의 과정과 결과가 후에 밝혀졌으면서도 좌익의 반탁은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1946.3.20~4.18까지 약 한 달 간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제 1차 미ㆍ소(美蘇)공동위원회는 좌ㆍ우 양방의 참가 단체 문제로 결렬됐다. 소련은 반탁을 주장하는 것은 삼상(三相)회의를 부정하는 집단이니 배제하자고 나왔고, 공동성명 5호로 해소의 기미가 보였으나 이승만, 김구가 계속 반탁을 주장하자 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결국 소련은 좌익단체를 많이, 미국은 우익단체를 많이 참여시키려는 양보 없는 대결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동위원회의 성공 가능성은 처음부터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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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제 1차 미ㆍ소(美蘇)공동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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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은 반탁도 의사(意思)표시의 자유이기 때문에 반탁파라고 해서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드디어 1947년 5월에 2차 공동위원회가 어렵게 열렸으나 정당, 단체 참가 문제로 또다시 평행선을 긋자 영영 중단되고 말았다.
이때 이미 동구권 폴란드, 헝가리 등 여러 나라가 소련 블록에 넘어가자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한 「트루만 독트린」이 나오면서 냉전의 골은 깊어만 갔다.
1차 공동위원회를 지켜보던 이승만 박사는 미ㆍ소의 협의로는 온전한 통일국가가 창건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정읍발표(井邑發表)’를 46.6.3에 함으로써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공위(共委)가 결렬되자 조선 공산당은 미(美) 군정을 옹호하던 기존 노선을 바꾸어 ‘대중 운동을 통하여 미(美) 군정을 압박하는 폭력적 전술’로 돌아섰다. 여기에는 소위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미(美) 군정의 좌익에 대한 관용이 많이 상실된 것에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1946년 9월 공산당 지령의 첫 파업은 부산 철도 노동자로부터 시작되어 전국 출판, 교통, 체신, 식품, 전기 노조에 확산되어 약 30만 명이 참가했다. 급기야 서울 용산역의 파업, 즉 전평(全評)운동은 군정의 강제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이 파업의 연장선상에서 대구 10.1사건이 터지고 경찰서와 공출을 주관하던 행정관서를 습격함으로써 경북 일대는 약 1개월간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때 여섯째 삼촌 정주(廷周) 숙부는 서울에서 주요 정치인, 이승만 박사, 인촌 김성수 선생 등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다가 진압경찰로 대구에 파견되어 갔다. 파견 중 야간에 숙소가 무장괴한에 의해 기습을 당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등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경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영덕 경찰서장으로 발령을 받아 아주 낙심천만이었다 한다. 그때 나이 약관 24세여서 전국 경찰서장 중 최연소자(年少者)였다 한다.
군정은 통치의 정상화와 자립적 역량을 배양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46.12.12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南朝鮮過渡立法委員會)를 구성했다. 그리고 군정장관의 「카운터 파트」로서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인 안재홍 선생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군정을 종식하고 새로운 자립적 정부 수립을 위한 단계를 밟아나갔다.
군정(軍政) 초기에는 「아놀드」 군정장관의 독특한 낙관주의와 소수까지 아우르는 통합정치를 모색했던 그 기질의 덕으로 좌파도 군정에 협조하며 잘 나갔고, 우파는 표면에 나와서 군정의 심기를 살피는 정치를 할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의 시사만평에 나오는 만화를 보면 「아놀드」 군정장관은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격으로 명(名) 지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그가 심장질환으로 급서(急逝)하자 「러치」 장관이 후임으로 들어섰고, 그는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좌.우의 폭력적 격돌과 나날이 심각해지는 냉전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남한단독정부라는 옹색한 종착역으로 열차를 끌어갈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당시 반탁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던 이철승(李哲承) 씨의 증언을 여기에 적어본다.
「45년 12월 27일 모스코삼상회의 신탁(Trusteeship)결정이 전해지자 한반도는 발칵뒤집어 졌다. 좌.우간에 우리의 자치(自治)능력을 부인당한 열강의 결정에 우선 자존심이 상했고, ‛얄타’ 결정에 의한 신생독립국으로의 밝은 희망이 무참히 밟히는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곧이어 10만 군중이 서울운동장에 모여 신탁 항의 시위를 강행했고, 정치 지도자들의 연이은 반대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때 좌 .우가 따로 없었다. 해방후 유일한 한마을 한뜻이 표출되었다.
그런데 일주일만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조선공산당 대표박헌영이 평양에 다녀온 후 좌익쪽에서는 반탁이 아닌 찬탁으로 돌변하고, 전국에 지령이 내려 간 것이다.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소련의 지령이었던 만큼 좌쪽에서는 목숨 걸고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져 해방정국은 더욱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우리 민족끼리의 불행한 물리적 충돌이 싹트기 시작했다(일부 좌파역사서에는 동아일보의 오보 또는 의도적 정략음모기사라고 문제 삼지만 전혀 실효가 없으며, 좌익의 찬탁 돌변을 정당화시키는데 이용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좌익의 찬탁은 많은 민중에게 좌익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민족자존심에 불타던 발랄한 학생들은 좌익활동에서 많이 이탈하는 결과를 갖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