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土地改革) (180회)
  제22장 나의 청소년기와 해방공간

토지개혁(土地改革)

제헌의회가 정책입법으로서 가장 먼저 논의한 것이 농지개혁 법안이었다. 해방군(解放軍)을 자처하며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임시 인민위원회를 통해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해 소작 농민들의 환영을 샀다.

이에 항상 압박을 받던 남한은 군정을 거치고 민국(民國)이 수립되자 토지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거국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한국은 개혁의 방법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 유상으로 할 것이냐, 무상으로 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유상으로 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절차를 밟을 것이냐, 많은 논의를 국회에서 했다.

이 농지개혁 법안의 주안(主案)을 위한 특위가 구성되었는데 농촌 출신인 숙부 옥주(沃周) 의윈이 여기에서 활약했다. 자신이 지주(地主)의 아들로서 자신의 뼈를 스스로 깎는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토지개혁은 처음부터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다. 일인(日人) 개인이 소유한 것, 일본 법인(法人)의 것과 동양척식(東洋拓植)이 소유한 것 등, 난마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리고 우리 전통 지주의 소유 부분에 있어, 경작하는 지주, 무경작 부재 지주, 지주와 소작을 겸한 농민 그리고 순수 소작(小作) 등 다양했다. 공평하고 생산적으로 결론을 내야 하는 역사적인 숙제에 봉착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하기가 무섭게 임시 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바로 토지개혁에 들어갔다. 남한과 달리 산(山)과 대지(垈地) 그리고 농지(農地)는 물론 전(全) 국토를 회수한 것이다.

이것은 ‘쓰나미’였고 혁명이었다. 이런 과격한 북(北)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이남(以南)은 발등의 불이 떨어졌고 떠밀려 가는 형국이어서 급한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맹랑한 사실은 토지개혁이 곧 된다는 소식에 소지주(小地主)들이 소작(小作)들에게 땅을 강매하는 일이 생겨 전염병처럼 전국에 퍼져 나갔다. 

좀 다행이었던 것은 미(美) 군정은 척식회사의 전 재산과 일본 법인의 재산을 신탁 관리하는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설립하고,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와 월남(越南)한 동포에게 일차 분배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48. 3. 정부가 수립되기 전, 군정(軍政)에서 중앙토지행정처(中央土地行政處)를 설립, 전국 농지의 세부적인 실태 조사에 착수했고, 정부 수립 후 많은 정책 자료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8 .15 광복 전후의 농지 소유 실태를 보면 농지 총 면적 222만 5,751.6ha로 자작농(自作農)이 전(全) 농토의 37%인 85만 ha, 소작농(小作農)이 63%인 147만 ha였다.

농가 호수(戶數)에서는 순 자작(自作) 13.7%, 자작 겸 소작이 34.6% 계(計) 자경(自耕)이 약 50%, 그리고 순 소작이 49%로서 반반 정도였다. 소적들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5:5의 비율이었고 곳에 따라, 그리고 소유자에 따라 3:7도 있었다.
 
▲ 농지개혁법안 국회상정 기사 [경향신문 1949. 3.11.]

제헌국회가 결정한 주요 토지개혁 내용을 보면,

① 개혁의 대상은 농지 중심으로 하고,
자경(自耕)하지 않은 자의 농지 중 3ha를 초과하는 농지를 환수하고
(9,000평~45마지기 정도),
그 대가를 해당 농지 연 수확량의 150%로 5년간으로 하고
(일 년에 약 30% 공출),
농지는 국가가 일괄 수매하고, 대가를 지주에게 지가증권(地價證券)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했다.

이런 원칙 하에 1949년 6월 21일 ‘법률 제 31호’로 ‘농지개혁법’이 발효되었다. 건국 당시의 토지개혁은 신생국의 경제기틀을 어느 정도 세우는데 유용한 정책이었으나, 우리나라 토지개혁은 불행히도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데 함량 미달이었다. 다시 말해 다른 형태의 산업자본(대만의 성공에 비해 볼 때)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지 못했고,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촉발하는데도 미흡한 점이 많았다.

정책 시행과정에서 시정, 보완되었어야 지주도 살고 농민들도 사는 Win Win이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역시 곧 이은 6.25 사변으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었고, 5개년에 끝날 것이 1961년 농지개혁사업 정리요강(整理要綱) 제정이 이루어지면서 1964년에 가서야 겨우 종결되었다.

14개년이라는 긴 세월을 끌어가다 보니 먹을 것이 없는 잔치가 되고, 농민들은 2대에 걸친 불만거리가 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집안의 예로 보면 일찌감치 무상으로 농지를 소작에게 많이 돌려주었고, 이 일이 숙부의 제헌의원 당선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일부 받은 지가증권(地價證券)은 삼촌, 형님들의 등록금과 용돈 정도로 그때그때 팔아 쓰고, 재투자를 위한 자본의 구실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 백부님의 한숨 섞인 말씀이었다.

여하튼 숙부 옥주(沃周)님은 토지개혁 입법에 일조했고, 「농지(農地)는 경자(耕者)에게」라는 대원칙이 유사 이래 처음 신생 대한민국에서 실시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좀 불가사의한 것은 초대 농림장관이었던 조봉암(曺奉岩) 장관의 토지개혁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지개혁 입법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행정부가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작성한 정부안(政府案)과 국회 산업위원회가 작성한 안(案)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국회 안(案)이 농민들에게 보다 유리했고, 국회에서 통과되어 정부에 공포 이송된 것을 행정부가 Veto하는 바람에 국회의 재의(再議)에 붙여 다시 정부에 보내져 가까스로 공포가 되었던 일이 있다. 

그때 농림의 수장(首長)으로서, 더군다나 진보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조(曺) 장관이 보수적인 정부안을 계속 밀었다는 것은 좀 납득이 가지 않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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