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진출의 꿈은 무산되고 (126회)
  제16장 정치에의 꿈과 5.18 광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그해 1월 31일 서울시지부 결성대회까지 참석하며 세를 과시하는데 소홀함이 없었고, 장군 출신 5명, 영관장교 7명까지 영입하면서 상도동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신군부의 정치적 출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정규 육사 4년 11기 출신 장교와 같이 군에 근무하면서 참 유능하고 군인정신이 투철한 장교들이고 언젠가 이들이 군의 상층부를 구성할 때 우리 군은 현대화되고 강군(强軍)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훈련을 시킬 때도 원리원칙대로 했고, ‘적당히’가 없었다. 그리고 성실, 정직해서 부대의 주,부식(主副食) 검수를 이들이 하면 틀림이 없고 배를 곯은 사병이 없어진다는 말까지 돌았다.

좀 엘리트 의식이 강한 나머지 선배 장교를 불신하고 대부분의 장성들을 ‘무능, 비리, 부정’한 부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정권을 노리는 「쿠데타」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최고로 올라가면 육참총장 그리고 국방장관 정도 상승하리라 기대를 했던 처지였다. 이 「유혈의 하극상」은 민주군대에서 그 유례가 없는 일이 아닌가.

정국이 일시에 얼어붙고 소용돌이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곧이어 YS의 가택연금, DJ는 반국가괴수로 연행,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이제 나에게 정치의 길은 없었던 걸로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런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일상은 돌아갔다. 관청은 모두 정상 출근했고, 거리에는 여전히 택시, 버스 그리고 자가용으로 넘쳐났고, 재래시장도 사람으로 넘쳐났다. 이제 정변(政變)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약 1주일 후 직장인 KNE에 들렀다. 신(辛) 수석을 비롯해서 간부들 모두 한마디씩 했다. ‘이제 정치길이 없어졌으니 다시 돌아와 같이 일합시다.’ 그러나 다른 일로 해서 사의를 표했으면 모르지만 정치계에 투신하려고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생각을 바꾼다고 하면, 나의 뜻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또 전 직원들이 모두 알고 있는 마당에 처신도 좋지 않겠다고 생각되어 고사(苦辭)했다.

다만 원자력연구소에 있을 때 대만(臺灣)의 핵능연구소(核能硏究所 :원자력연구소) 왕(王) 부소장의 초청이 「펜딩」되어 왔었는데, 이참에 여가가 좀 있을 때 다녀오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왕 부소장이 78년도 우리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내가 Counter-part로서 좀 특별히 대접을 해서 보냈고, 고리발전소 그리고 신라문화재 경주 구경 등을 곁들였던 것이 퍽 인상에 남은 모양이었다. 우리나라가 외화 사정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항공권도 나에게 보내줬다.

왕 부소장은 황포(璜浦)군관학교 출신 현역 대령으로 대만 핵개발의 실무 총책임을 맡고 있는 분이며, 1949년 대만 천도 때 도강(渡江)한 엘리트의 한 사람이었다. 중국 본토와 수교 전이라 대만과는 최고의 관계일 때 방문했던지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도 「타이페이」의 최고 호텔에 안내하고 모든 식사도 「싸인」만 하면 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도착 다음날 연구소에 안내 받아 Canada Chalk River에서 보았던 NRX(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전형적인 중수로)의 위용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 갔을 때 Saclay 재처리공장에서 보았던 Hot glove box와 같은 크기의 밀폐된 수많은 작업박스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미국의 본격적인 압력을 받았던 1976년 경 대만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성화에 굴복하고 모두 가동 중단과 함께 「봉인」되어 있었다. 이제 할 일이 없다고 한다. 대만전력(電力)에 기술 협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푸념을 했다.
 
▲ 대만(臺灣)의 핵능연구소(核能硏究所) 왕(王) 부소장과 만산 원자력발전소 방문 
 
그날 저녁 약소국의 비애를 술로 삭히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때 안주로 나온 「북경오리」의 고소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10년 만인 1989년에 베이징에 가서 먹었던 「원조(元祖) 오리」에 비하면 대만 것이 훨씬 맛이 있었다. 대만 오리를 100점이라고 하면 북경 것은 7~80점 밖에 되지 않았다. 1972년도 Nixon 대통령 일행이 「마오타이」 술과 함께 즐겼다는 Beijing duck이라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실망이 컸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대만의 오리 요리는 재료도 상품이고 본토에서 피난 온 고급 요리사의 작품이리라 생각했다.

다음날은 대만전력에 들러 설계기술 국산화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모두 열심히들 하고 있었다. 다만 원전(原電)이 아직도 Turn-key 방식이 대부분이고 미국의 Westinghouse 그리고 GE의 영향력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대만전력 공보실장의 안내로 왕 부소장과 나는 승용차 편으로 BWR 2기가 가동하고 있는 「만샨」 발전소에 들렀다. 대만 동편 바닷가에 위치한 「만샨」은 천연의 요새 같은 곳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파고 원자로를 앉혔는데 원자전(原子戰)에서도 끄떡없는 전략적인 위치이다. 이 사람들의 전쟁에 대비한 계획들은 아주 철저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소위 영빈관이라고 하는 초막 같은 일식(日式) 관사 건물에 안내되었는데, 현관 입구에서 꺼칠하게 생긴 60대 노인 한분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오늘 점심을 책임진 어른이라고 했다. 이윽고 음식이 나오는데, 식탁에 Serve하는 것도 이 노인이 하고 요리 내용도 이분이 설명하는데 솜씨가 기가 막혔다. 음식에 올린 장식도 특이했거니와 입맛에 짝짝 붙는 그 맛깔은 국내에서 먹어본 중화요리와는 전혀 달랐다. 

기이한 재료를 쓰고 약 10여 가지 코스요리인데 참말로 중국 장인(匠人)의 솜씨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이야기인즉 이 요리사는 북경의 최고급 주방장으로 있다가 장개석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피난을 왔고, 혼자 외롭게 사는데 대만전력에서 뒤를 봐준다고 했다. 분단의 슬픔은 거기에도 예외 없이 존재했다.

공식일정을 대충 마치고 귀국해 봐야 별 볼 일 없을 터이니 온 김에 푹 쉬고 가라는 왕 부소장의 간곡한 초청에 일제시대에 개발했다는 신고산(新高山)쪽 호수 휴양지에 갔다. 아열대 우림에 둘러싸인 이곳은 100여년의 「리조트」 역사가 있어 참 좋은 곳이었다. 

맑고 거대한 호수에 「트래킹」 할 수 있는 산림 속의 멋있는 둘레길 그리고 풍부한 온천수, 휴양지로서 완벽하게 조건이 갖춰져 있었고, 중국 대륙의 사치스러운 음식문화까지 곁들여 있어 동양 제 1의 「리조트」로서 손색이 없었다. 융숭한 대접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대만 시골이나 도시의 시장거리에서 만난 중년들은 의외로 일본어를 잘 구사했다. 나와의 일본어 대화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잘 통했고, 한국처럼 반일감정이나 혹독한 일제강점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만인들은 어차피 중국대륙의 지배나 일본지배나 항상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치안이 좋지 않았던 대륙지배에 대해서 오히려 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제도 그리고 철도, 도로개발 등의 근대화에 기울인 일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대만에 일본 관광단이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귀국 후 KNE에 찾아가 완전히 신분정리를 하고 나니 이제는 소위 「룸펜」의 신세가 되었다. 우선 소일거리로 용인 양지에 마련한 15,000여 평의 농장을 개발하는 것이 일이었다. 농원개발에 경험이 있는 강대진(姜大鎭) 군을 고향에서 불러올려 현장에 투입했다. 장비로 임도(林道)를 내는 동시에 200여 평이 되는 온실을 두 동(棟) 마련하고 30여 평의 농가도 건축했다.

용인군과의 협의 끝에 뒷산에는 유실수를 심어야 개간이 가능하다고 해서 당시에 유실수라고 하면 밤, 감 밖에 없는데 감은 적합 지역이 아니어서 밤을 심기로 했다. 고향 다압(多鴨)에서 우리나라 밤, 매실 단지(團地)사업의 창시자인 김서정(홍쌍리 여사의 시아버님) 선생이 추천한 밤인 ‘녹조’를 중심으로 약 1,000주(柱)를 가져다 심었다. 그리고 조경으로는 잣나무, 일본산 길야(吉野) 벚꽃나무들을 식재했다.

중부지방에 잘 적응된 묘목, 특히 자두, 매실 등은 인근의 ‘자연농원(自然農園)’에서 많은 신세를 졌다. 내자(內子)가 ‘신라(新羅) Hotel’에서 화원을 경영하며, 장식 꽃꽂이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자연농원과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의 지론은 「유실수(有實樹)로 강산(江山)을 덮자」여서 일본에서 개발한 매실, 자두 그리고 조경수들은 자연농원이 원조였고, 품종이 다양하면서 고급이었다. 농원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일 년 만에 그 기초가 잡히고, 30여 년이 흐른 지금은 모두 성목(成木)이 되어 하늘이 안 보일 정도의 아름드리로 자랐다.

이렇게 해서 나의 생산적인 소일거리가 생겼고 지금까지 농원에서 흙을 만지고 산을 타며 소일한 덕으로 나의 건강이 유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던 골프도 거의 끊고, 매 주말이면 전국의 산야를 누비던 등산 취미(KIST, 원자력연구소에서 한동안 등산회 회장을 맡았음)도 농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자가 꽃꽂이 교실로 마련한 광화문의 아파트를 나의 개인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나의 은퇴 후의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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